별의 아이가 별의 아이를 먹다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 베어 물자 경외감이 전두엽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만약 평행 우주가 존재하고 또 다른 내가 중세 유럽에 살고 있는데 이런 맛을 느꼈다면, 난 어쩌면 신을 모독한 불경죄 또는 이단을 숭배한 죄로 거열형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의 역작 '장미의 이름'을 다시 상기해보자. 호르헤 신부와 윌리엄은 각각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대표한다.
이들의 충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나오는 '웃음'이라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다. 보수파라 할 수 있는 베네딕트파는 불완전하고 하찮은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규범과 질서를 생산한다는 것. 즉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중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보수교단의 공격이 있었던 것도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마이클 잭슨 같은 팝스타도 내내 비슷한 공격을 당했다.
지금 내가 식도로 밀어 넣은 이 짜장면은 인간의 언어로는 최소한 김남훈의 언어로는 재조립되어 음성 또는 문자로 전해진 적이 없다.
이 짜장면을 접하기 전까지 난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세 번째 키스 같은 맛'이라고 했다. 대개 첫 번째, 두 번째 키스는 다소 욱하고 올라오는 알코올 향 또는 자극적인 곱창전골과 함께하지 않는가. 하지만 세 번째는 좀 다르다. 봄에 서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처럼, 여름날 숲 속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처럼, 부드럽게 가라앉는 가을의 석양처럼, 황량하면서도 숭고함을 지켜내는 한겨울의 흰 벌판처럼. 니콘 렌즈처럼 피사체가 명확하고 선명하지 않던가.
물론 반론의 여지는 있다. 방금 먹은 이 짜장면은 친구들과 함께 당구장에서 먹었다. 당구장에서 먹는 짜장면은 어쩌면 반칙이라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학력고사 세대에게 당구장은 단순한 스포츠 레저 시설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는 혈기왕성한 소년들의 파이트 클럽이자 이웃 H고교 학생들과 영역다툼 끝에 패싸움이 벌어지는 유혈이 낭자한 콜로세움 아닌던가. 그런 살벌한 곳에서 짜장면을 먹는다는 것은 수컷으로써 영역의 완성과 위수라는 테제를 만족시킨 자만이 얻는 일종의 트로피 같은 것이었다. 약해빠진 녀석들아 보거라! 우린 오늘 이곳에서 맛세이를 찍고 짜장면을 흡입하고 짬뽕국물에 소주도 마신다. 우하하하!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짜장면은 다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로 대표되듯 신의 진리의 독점으로부터의 해방과 인간 이성의 회복이었다. 난 이 짜장면을 통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새로운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해 고찰할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한 고찰인가? 근원에 대한 고찰이다. 원점에 대한 탐구다.
인간은 탄소, 수소, 질소 등의 원소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원소들은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생성과 사멸을 반복하면서 생긴 것들이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말했듯 우린 모두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진 별의 아이인 것이다. 짜장면을 구성하는 물질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짜장면은 성분 학적으로 99.9% 동일하다.
별의 아이인 내가 별의 아이를 먹었다. 별이 별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헬멧 실드에 촘촘히 물방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새로운 우주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