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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훈 해설위원 Oct 02. 2022

그날의 맥주

난 맥주를 좋아한다. 한때 과하게 술자리를 가졌을 땐  맥주로 시작을 해서 시간이 더 남으면 2차로 소주를 마시고 그다음 칵테일바까지 갔다가 다시 맥주를 마신 적도 있다. 새벽 2시는 가볍게 넘기곤 했다. 코로나 팬데믹 영업규제의 습관이 아직 몸에 남아 밤 10시면 벌써 엉덩이가 가벼워지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음주습관이다. 지금은 그렇게 까지 마시진 않는다. 맥주는 부피로 마시는 술이다. 먼저 잔을 잡았을 때 술잔의 부피감이 남다르다. 생맥주잔은 손잡이가 툭 튀어나와 있다. 주인장이 냉장고에 넣어두고 차갑게 해 둔 것이겠지만 머릿속으로는 차가운 맥주 때문에 잔도 손잡이까지 차가워졌다고 생각해버린다. “호오. 술에 의해서 잔까지 차가워진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목으로 넘길 때의 부피감도 남다르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안착했을 때의 묵직함도 남다르다. 유튜브를 넘기다가 가끔 튀어나오는 맥주 광고는 항상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세상을 무한히 긍정하고 있다. 노동 후에 휴식을 취하고 경쟁 끝에 성취를 만끽할 때 마시는 술이 맥주다. 살짝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도 저렇게 맥주와 함께 세상을 긍정하던 때가 있었다. 아주 맛있게 말이다.


2001년이었다. 세기말에서 새로운 세기로 넘어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심 다들 기대하지 않았을까. 혜성이 충돌하든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든 뭔가 시끄럽고 대단한 일을 말이다. 그렇게 희망이 없고 단조롭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에 어떤 균열이 시원하기 나길 바랬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내 개인에게는 일어났다. 어느 신문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프로레슬링을 화두로 꺼냈고 그것이 하나의 불씨가 되어 직접 입문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은 나중에 설명하고자 한다.


프로레슬링 도장 서울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직선거리로 치자면 강남에서 아주 먼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최종적으로 20분 정도는 걸어야만 했다. 마지막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이정표 없는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야만 했다. 주변엔 조그마한 공장들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프로레슬링 도장엔 20여 명 남짓 있었다. 몇몇은 예전에 잠깐 하다가 다시 돌아왔고 나머지는 나 같은 신입이었다. 처음엔 훈련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오직 스쾃뿐이었다.. 개수는 정해지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건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를 의미했다. 처음엔 100개 남짓에 힘들어하다가 차차가 개수가 늘었다. 천 개 언저리에 이르자 다음으로 넘어갔다 복근 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 개수는 늘었지만 탈주생이 점점 늘어났다. 주한미군 방송인 AFKN TV로 보던 WWF 프로레슬링은 박진감 넘치는 판타지 그 자체였다. 빠르고 경괘한 입장곡, 화려한 의상, 관중석에서 끝없이 터지는 플래시. 하지만 이곳 도장에선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 동네 체육사에서 사 온 운동복, 습기에 절어 깜빡거리는 형광등이 전부였다. 계절이 몇 번 바뀌자 이제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제 로프반동도 배운다. 살아남았다는 자신감이 압력밥솥에서 증기가 밸브를 뚫고 나오듯 땀구멍을 타고 나오곤 했다.


어느 날 오전 합동훈련이 끝나자 선배들이 먼저 자리를 떴다. 선배들이 자리를 뜨자 몇몇은 눈치를 보다가 금요일 저녁을 즐기기 위해서 친구들을 불러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도장엔 나 포함 다섯 명이 남았다. 그중 한 명이 밖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시디플레이어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스피커에서 SES와 브라운아이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용감하게 음악을 튼 이는 아무리 봐도 운동에 소질이 없었다. 낙법을 하다가 머리부터 떨어져서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박박 깎고 본인이 락을 닮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나이도 속였다.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끝내 동갑이라고 했다. ‘나이가 많은 신참 프로레슬러’가 되기 싫었나 보다 했다.


장혜진의 아름다운 날들 덕분에 도장의 명도가 채도가 20%씩 올라갔음에도 링에서 혼자 계속 낙법 연습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에이스였다. 원래 다른 투기 종목을 했다고 했다. 관장도 선배들도 이 친구에겐 각별했다. 생긴 것도 잘 생겼고 몸도 좋았다. 운동신경도 뛰어나서 금세 탑 로프 턴 버클에서 뛰어내릴 정도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졌고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이곳에 왔다고 했다. 쿵 쿵 링 바닥에 떨어질 때 소리 자체가 나와는 달랐다. 외국인도 있었다. 방금 전 ‘너스레’가 음악을 틀었던 시디플레이어는 몽골 선수가 가져온 것이다. 키가 190cm가 넘는 듯했다. 매니저는 2m라고 했는데 거기까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몽골에서 꽤 사는 집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프로레슬러의 꿈을 좇다가 여기까지 온 것인데 말이 통하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가 없었다. 또 한 명은 중국인 정확히는 대만 선수였다. 대만은 일본 프로레슬링이 꽤 인기가 있는데 현지 프로모터의 소개로 이곳에 왔고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자 너스레가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도장 바로 옆에 선수들 식사를 챙겨주는 함바집(밥집)이 있었는데 주방 아주머니는 선배들 차를 타고 일찍 가버린 뒤였다. 너스레가 우리 보고 함바집 옥상으로 모두 올라가라고 했고 잠시 후 손에 한가득 뭘 들고 왔다. 자세히 보니 맥주였다. 주방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져온 것, 정확히 말하면 훔쳐온 것이었다. 야 그러다가 혼나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다가 까짓 뭐 다시 채워 넣으면 되지 라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주저앉았다.


하루 운동이 끝나면 체중이 4~5kg 줄어있다. 그만큼 수분이 빠졌으니 맥주는 얼마나 달콤할까. 도장 스피커에선 신승훈의 아이빌리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승훈의 목소리에 반응해 갈색 유리병 속에서 맥주가 출렁이는 것 같았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은 한낮의 여열이 남아서 따스했다. 근육 속 포도당이 완전히 소모된 몸에 차가운 맥주가 들어가자 미각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눈앞에선 태양이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기 직전이었다. 하늘이 불게 물들었는데 황제의 망토 같았다. 어떤 절대군주가 왕좌에서 일어나 붉고 거대한 망토로 회랑을 채우며 걷는 것 같았다. 최대 심박수를 계속 피크 치면서 달아올랐던 몸과 노란 태양과 붉은 하늘과 맥주는 그 자체로 어떤 거대한 공허함이면서 가득 채우는 무언가를 메트로놈 바늘처럼 오고 가고 있었다. 이때 도장 옆 작은 도랑을 가로질러 있는 공장에서 작은 승용차 하나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나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혹시 저 자동차를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숄더 태클 치면 저 차 넘기지 않을까” “드롭킥으로도 될 것 같은데?” 너스레가 넉살 좋게 받았다. 에이스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몽골과 대만 선수를 위해서 너스레가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해줬다. “유 아 스트롱, 태클 스트롱, 드롭킥 스트롱, 카 태클 떼굴떼굴” 그 친구들도 잠시 후 웃기 시작했다. 우린 모두 세상을 긍정하고 있었다. 맥주 광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긍정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자만과 오만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맥주는 참 맛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단체는 생각했던 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고 몽골 선수는 몇 경기를 하다가 귀국을 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숙소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도장 근처 공장에서 일하던 몽골 노동자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에이스는 꽤 좋은 스폰서와 연줄이 닿았는데 기쁜 마음에 친구들과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었다. 바로 앞에 택시가 있었는데 이제 돈을 벌게 되었으니 모범택시를 타겠다고 도로를 무리하게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너스레는 어쩐 일인지 멕시코로 간다고 했고 몇 번 국제전화가 왔었는데 연락이 끊겨 어찌 됐는지 알 수 없다. 대만 선수는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출연작이 나오지 않는다.


난 이제 맥주를 마시며 세상을 긍정하진 않는다. 심지어 그날처럼 아드레날린에 푹 절여진 육체로 루프트탑에서 붉은 석양을 보면 맥주를 마실 때도 세상을 무한히 긍정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태클로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맥주를 좋아하지만 어쨌든 그런 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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