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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May 30. 2022

함께 산다는 것

with. 노희경_<우리들의 블루스>


"그래, 영희 누나 보고 놀랐어. 근데 난 그럴 수 있죠. 다운증후군을 처음 보는데 놀랄 수 있죠. 그게 잘못되었다면 미안해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몰랐다고요."


노희경_<우리들의 블루스 14화, 정준 대사 중에서>




노희경 작가님의 문장들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정준의 이 대사를 들으며 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칠 것이다.


언제나 소수의 편에 서라.

너와 다른 사람을 인정해라.

소외된 사람에게 등 돌리지 마라.

그리고 혹 네가 소수에 서는 사람이 되더라도, 소외받는 사람이 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노희경_<슬픈 유혹을 끝내 놓고>


약자라고 하면 장애가 있는 사람을 떠올린다. 나는 그 무리에 속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세상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나고 나도 언제든 사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비약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없어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린아이 때 약자였고 나이 들어 노인이 되면 다시 또 약자가 된다. 특정 장소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차별받고, 약한 신체와 더딘 행동으로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렇게 사람은 살면서 최소한 어느 한순간에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오래 한 나는 그래서 "혹 네가 소수에 서는 사람이 되더라도, 소외받는 사람이 되더라도 좌절하지 말라는" 이 문장이 내내 좋았다.        


작가님의 이전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틱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다음 카페에는 드라마 방영 전부터 장애와 관련하여 이런저런 이유들로 카페를 찾아와 드라마 방영 중지를 요청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 작가님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을 카페에서 들어야 하는 나에게 미안해하셨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 크게 흔들리지 않는 작가님이 그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마 장애를 가진 사람, 사회에서 약자인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사회가 되는지를 계속 생각하셨나 보다. 나는 이 드라마에서 실제 다운증후군을 가진 정은혜 배우가 나오는 순간 그동안 작가님의 드라마가 한꺼번에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여러 캐릭터들로 생각을 발전시켜, 장애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결론을 만든 느낌이 들기도 했다.


김승섭 교수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정준의 대사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 정준의 대사가, 그리고 드라마 속 푸릉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듯 따뜻한 마음들이 생각날 것이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고, 배우지 못했으니 배우겠다고 말하며, 늦었더라도 배웠다면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그 과정에는 무수한 실수들이 있겠지만, 사람은 경험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 테다.     


이런 드라마를 보고, 이런 생각들을 할 때, 왠지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싶어 진다. 이번에도 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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