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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Sep 09. 2023

혼자 떠나는 유럽여행(밀라노) - 10

밀라노에서 만난 천사들


포르투의 마지막 날 아침이다. 오늘은 포르투를 떠나 마지막 여행지인 밀라노로 간다. 캐리어와 짐을 챙겨 게스트하우스를 떠난다. 이른 아침부터 영업 중인 카페에 들러 동네 할아버지들과 섞여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뿌려 휘휘 저어 홀랑 한잔을 마신 다음, 아침으로 먹으려고 보기만 해도 이가 달큼해지는 손바닥만 한 끈적한 빵을 사서 지하철역으로 간다. 








너무 달아서 한 입을 먹고부터는 먹을 수 없어서 종이봉투 입구를 봉해버린다. 여기서 지하철을 잘못 타면 리스본으로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으로 돌아간 바로 다음 날이 연수원 첫날이므로 즉흥적으로 리스본으로 떠났다간 채용이 취소될 것이므로 어림없는 생각이다.



한 개만 산 줄 알았는데


한 개 아니라 두개 샀었네?



이변은 없다. 무사히 공항을 가서 비행기를 기다린다. 가격은 낮고 악명은 높은 항공사는 명성답게 지연에, 지연을 거듭한다. 결국 오후면 도착했어야 할 비행기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밀라노에 다다랐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 창밖으로 이미 어둑해진 바깥을 한 번, 빠르게 줄어가는 휴대폰 배터리를 한 번 본다. 다행히 숙소 가는 방법과 지도를 미리 인쇄해 와서 휴대폰이 꺼져서 구글맵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이 너덜거리는 A4 용지를 보면서 무사히 숙소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밀라노는 소매치기로 유명하다(관광지로 유명한 유럽 국가라면 어디라도 그렇잖아)···는 걱정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식사를 못한 지 너무 오래됐다. 영국에서 만난 M이 호텔 로비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M의 회사 탕비실에서 꺼내 준 와플 과자며 간식 몇 개를 먹은 것 말고는 먹은 게 없다. 기나긴 굶주림으로 약간의 흥분 상태가 되어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른다. 밀라노 역에 내려서 본격적으로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아무도 내 가방에 손댈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리라······여차하면 캐리어를 번쩍 들어 휘두를 테다······하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연보라색 머플러를 칭칭 두르고 낑낑대며 캐리어를 끌고 가는 동양인 여자애에게, 놀라울만치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아서 레이더를 바짝 세웠던 것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다. 역시 세상 사람들은 좀처럼 남에게 관심이 없다. 특히 털어봤자 먼지나 나오지 않겠나 싶을만치 초라하고 지쳐 보이는 관광객에게는 누군들 그러겠지.



한송에 종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밀라노에서 예약한 비즈니스호텔을 찾아 골목을 헤맨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닳아 전원이 나간 지 오래다. 비슷한 거리를 몇 번 왕복하다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까짓 종이 지도로는 숙소를 못 찾겠다는 걸······. 내 옆을 지나치는 아주머니를 붙들고 종이 지도를-지도라기에 민망한 얼룩지고 나달거리는 A4용지를-간절하게 들이밀며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느냐고 묻는다.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성심성의껏 길을 알려주고, 덕분에 나는 무사히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있는 웰컴푸드로 준 초콜릿을 허겁지겁 까먹었다. 나는 생초콜릿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평소라면 먹지 않았겠으나 이것저것 재고 까다롭게 굴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몇 시간 만에 먹는 음식을, 초콜릿을 황홀한 기분으로 녹여먹었다.






기운을 좀 차린 뒤 저녁을 먹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골목을 벗어나 시내로 나가 레스토랑 밖에 있는 메뉴판을 살펴본다.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같이 나오는 세트메뉴를 먹기로 하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는다. 혼자 식사를 하러 온 사람은 나뿐인가 보다. 웨이터에게 식탁 위에 있는 빵이 무료인지 물어본다. 식탁 위에 있는 것을 그냥 먹었다가 나중에 그 값까지 치러야 했다는 일화를 유럽여행 카페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뭘 먹기 전엔 꼭 확인을 한다. 



웨이터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이다. 그가 웃으며 얼마든지 먹으라고 하고 다른 손님에게 돌아간다. 바구니에 담긴 기다랗고 조금 딱딱한 빵을 먹으며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 한 덩이, 구운 애호박과 가지, 바질파스타가 한 접시에 나왔다. 만 얼마치이고 꽤 구성이 좋은 데다가 양도 많아서 흡족하다. 





한국에서 먹던 파스타와 다르게 면의 밀도가 아주 높다고 해야 할까, 아주 묵직한 느낌의 파스타를 꼭꼭 씹어먹는다. 간이 세지 않아서 늦은 저녁으로 먹기에 좋았다. 과연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이렇구나······하고 재밌는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큰언니가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된 느낌의 파스타를 먹고 체한 뒤로 아주 고생을 하다가 돌아온 걸 알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접시를 깨끗하게 싹싹 비우고 일어선다. 테이블 위에 식전빵에는 손을 거의 안 대다시피 해서 많이 남았다. 남은 걸 다른 사람이 먹는 걸까 생각하며 저녁값을 치르고 숙소로 돌아가 대자로 사지를 뻗치고 누워 잠들었다.





밀라노의 아침이다. 숙소에 커피머신과 캡슐이 있어서 한 번 써보고 싶었으나 나는 캡슐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방법을 모른다(회사에 간 후 사무실 한편에 위치한 탕비실에서 커피머신 사용방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어림짐작으로 아무거나 눌렀더니 뜨거운 물만 나오고 멀쩡한 캡슐만 버렸다. 



호텔 직원이 조식으로 크루아상 한 개, 파인애플 맛 요구르트 한 개와 1인분 몫의 버터와 딸기잼, 누텔라 잼, 살구잼,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잔과 도넛 모양의 과자 하나를 바구니에 담아왔다. 직원이 바구니를 올린 트레이를 내게 넘기고 돌아가고, 나는 창가로 아침을 가져가 바닥에 앉아 그가 가져온 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모조리 먹어치웠다. 고요한 아침, 호젓한 기분에 휩싸여 어제의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행복하다는 기분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밀라노 시내를 구경하러 나간다. 밀라노에서 하루뿐에 묵지 않으므로 관광지를 갈 생각은 없고, 숙소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아는 사람들에게 줄 선물도 좀 살 참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상점가가 늘어선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빈티지 명품이며 카메라를 파는 가게가 많다. 이 시점-2018년-에서 명확히 아는 브랜드는 루이뷔통뿐이었는데, 역시 이 시점에서는 명품에 대하 아는 것도 없고, 당연히 관심도 없었으므로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아는 브랜드가 많다고 살 수는 없었겠지). 






점심을 먹을 식당도 찾아보지 않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강렬한 느낌이 드는 운명적인 어떤 곳에 우연히 들어갈 생각이다. 곧 점심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꽤 앉아있는 식당에 나도 들어간다. 현지인들이 많으면 그곳이 맛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해물볶음밥(아마도 빠에야였을)과 샐러드를 시켰는데 이번에도 만원 초반대 가격에 양을 푸짐하게 주는 가게를 잘 고른 것 같다. 오징어와 홍합, 새우와 완두콩이 들어간 되직한 볶음밥과 새우와 아몬드, 토마토가 들어간 신선한 샐러드를 먹었다. 이탈리아는 어딜 가나 식전빵을 주는 모양이므로 이번에는 묻지 않고 테이블 위에 있던 식사빵 하나를 같이 먹었다.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간 곳은 대형 슈퍼였다. 그곳에서 대학교 동아리 친구들에게 줄 레몬술과 안주로 같이 먹으라고 초콜릿 한 봉지를 샀다. 언니에게 주고, 집에 두고 두고두고 먹으려고 잼을 여러 병 샀다. 역시 이 시점-2018년-에 무화과잼과 밤잼, 배로 만든 잼 등 다양한 잼과 바질페스토 같은 소스는 신기하고 낯선 것이었다! 내가 아는 잼이란 복음자리 딸기잼이나 엄마가 직접 쑨 귤잼뿐이었고 바질 어쩌고라는 것도 여기에서 처음 먹어봤다고······. 



낯선 식재료를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그리고 내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커다란 유리병에 담긴 잼이며 소스를 마구잡이로 담기 시작했고(가격이 비싸지 않았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들고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였다. 그 무거운 것들을 낑낑대며 짊어지고 계산대로 가져가는 동안에도, 이곳을 나가서도 아주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친절한 슈퍼 직원의 도움을 받아 계산을 무사히 마치고 비닐봉지에 모조리 넣은 다음 그것을 안고 가는데 팔이 몹시 아픔과 동시에 자꾸만 병이 떨어질랑 말랑하며 위기를 불러오는 탓에 아찔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무화과 잼 하나가 봉지를 탈출해서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길바닥에 유리를 깨트리다니 정말 최악의 민폐여행객이야, 라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유리병 조각을 수습하는데 웬 지나가던 사람이 기꺼이 나와 함께 허리를 굽히며 도와주지 뭔가. 첫날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 아주머니와, 계산대에서 헤매고 있던 나에게 방법을 알려준 아저씨, 식당에서 마주치면 활짝 웃어주던 할아버지, 그리고 이 행인까지! 이탈리아는 친절의 나라구나······이들이 이방인에게 베풀어 준 친절에 감읍할 따름으로, 황송한 마음이 되어 각종 유리병 무게에 짓눌린 채로 비틀리 거리며 돌아왔다(한국에 돌아와서 너무 달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외면을 받은 잼은 1년쯤 지나 일부는 고스란히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비통한 심경을 감출 수 없고)(사온 당사자인 나조차 먹지 않았으므로 할 말은 없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지하철을 타고 말펜사 공항으로 가야 했다. 지하철역에 가니 플랫폼이 많아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헷갈리고 티켓을 사는 줄은 너무 길고 해서 키오스크로 표를 끊어야겠군,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캐리어를 끊고 키오스크 앞에 가서 말······펜······사······ 버튼을 누르고 있었더니 줄을 서있던 웬 아저씨가 불쑥,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왔다. 말펜사 공항으로 가는데요, 했더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나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그의 제안을 승낙하기도 전에 그가 내 캐리어를 잡아채더니 앞서 빠른 걸음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열심히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간 곳은 매점이었다. 




매점에 들어선 그는 세 겹으로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손을 번쩍 들고 카운터에 서서 열심히 사람들을 상대로 계산이며 빵 따위를 건네주고 있던 주인에게 말펜소 가는 티켓을 달라고 외쳤다. 사람들 모두 우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고 주인은 선선히 티켓을 건넸다. 왜 매점에서 티켓을 파는 거야······이 아저씨 말을 왜 듣는 거야······싶은 의아함이 들었지만 아저씨의 마법 같은 힘이었는지 나 역시 주인에게 돈을 주고 티켓을 받았다.




내 티켓이 정확한 것인지 확인한 아저씨는 다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 캐리어를 번쩍 들고 숫제 뛰어가는 게 아닌가. 아저씨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조금이라도 길이 막힐라치면 당장 비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마치 우리가 당장이라도 기차를 놓칠 위기에 쳐한 것처럼, 이 기차를 놓치면 두 번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나는 네 시간 여유를 두고 기차역에 왔으므로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하등 없었지만 뭘 어쩌겠어). 




나는 연보라색 머플러를 휘날리며, 이 아저씨가 이렇게 내 캐리어를 들고 도망가버리는 것 아닌가 걱정하며, 그를 따라 종횡무진 달렸다. 그는 플랫폼으로 날 데려온 것이었다. 그는 어디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야 하는지 일러준 뒤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고 쿨하게 돌아갔다. 성격 급한 천사를 만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게 매점에서 티켓을 사게 한 걸로 매점 주인에게 수수료를 받는지도 모르겠지만-바가지를 썼다는 기분은 아니다(사실 확인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그에게 온전히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가 내게 바가지를 씌워 티켓을 사게 했을지라도 역시 고맙다(이런 걸 호구라고 부르지). 




나는 그 덕분에 한국에 돌아가면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고(실제로 지켰느냐고 묻는다면······글쎄) 여유롭게 공항에서 커피도 마시고 저녁도 먹었다. 커피를 시킬 때 가게 주인이 내게 라테 발음을 제대로 가르치려고 한 걸 보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체로 오지랖이 좀 있는 편일까.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혼자 외국으로 떠났던 경험을, 기억의 파편을 모아서 쓴, 아마 일부 오류가 있는 사실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적은 글이다. 나는 해외여행이 별세계의 일인 것처럼 굴며 살았고, 특권층의 권력인 것처럼 질시했고,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오는 자리에선 지독한 소외감에 시달렸다. 복잡한 감정을 품고 떠난 여행은 몹시 감격스러웠으나 혼자였으므로 대부분 시간 외로웠는데······이제 어디 가서-내가 영국을 갔을 때는 말이지-그런 이야기를 자랑 삼아 할 수 있다. 이 여행은 입사 후 떠난 휴가나 신혼여행과는 너무 달랐다. 여행이 어땠나, 여기서 느낀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항상 이야기의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누구나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누구나 갈 수 없다. 내가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안 가도 그만, 가도 그만이다.


갈 수 있다! 당신도! 


(마통을 뚫는다면, 혹은 뚫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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