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드 Jul 28. 2021

40. 나의 영웅들

나의 영웅들이 사라져 간다

"나의 영웅들...(중략)... 많은 나의 영웅들이 사라져 간다." - 드라마 <미생> 3화 中


드라마 <미생>을 10번 가까이 본 것 같다. 작년에 특히 많이 봤다. 3화에서는 주인공 장그래가 꿈 속에서 자신들의 영웅들을 붙잡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한번도 이 장면을 공감한 적이 없다. 그 '영웅들'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였다. '영웅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막연히 자신이 떠나온 바둑에 대한 미련이라고만 이해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바둑이 뭔지 궁금해 졌다. 2016년 알파고가 등장해 세상에 파란을 일으켰을 때도 나는 바둑에 관심 없었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4:1로 패한 것이,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1승을 거둔 것이, 그리고 그 수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세상은 떠들어댔지만 무관심했다. 다만, 2018년에 작문 스터디를 하면서 어떤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바둑이 어쩌면 예술과도 관련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작년에 가장 열중한 분야는 안타깝게도 바둑이었다. 불안하니 공부가 손에 안 잡혔고 바둑 만화를 봤다. 다름 아닌, 애니 <고스트 바둑왕>이다. 중학교 때 만화책을 빌려 봤던 기억이 난다. 이해를 하면서 본 건지는 모르겠을 정도로 내용이 기억이 안 났다. 재밌게 봤던 기억만 났다. 그러다 작년 12월 초에 내가 구독하고 있는 티빙(tving)에서 이 만화를 발견하고 보기 시작했다. 꽤 많은 분량이었는데, 3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고스트 바둑왕>은 제목 그대로 바둑에 관심도 없고, 바둑을 둘 줄도 모르던 주인공 히카루 옆에 '사이'라는 고대 바둑 기사 귀신이 붙는 내용이다. 사이는 신의 한 수를 두기 위해 죽은 후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인물, 아니 귀신이다. 이 만화의 주제를 가장 잘보여주는 장면은 사이가 자신과 같이 신의 한 수를 추구하는 바둑 명인과 인터넷 바둑으로 한판의 명승부를 내는 장면이다. 사이는 이 바둑을 두고 신의 한 수에 가까워졌다는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옆에서 대신 클릭을 해주던 주인공 히카루가 그 바둑에서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수를 말하면서 사이의 만족감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순간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신의 한 수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사이 본인이 아닌 히카루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이는 이렇게 말한다. "신이 나를 여기로 보낸 이유는 이 바둑 한 판을 히카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실제로 임무를 다한 사이는 며칠 뒤 사라진다. 신이 허락한 시간이 거기까지인 것이다.


나는 사실 여기까지만 보고 제목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제목이 '고스트 바둑왕'인데 고스트가 사라지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히카루도 그 사실을 아는지 그 '고스트'를 찾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물론 당연히 사이는 찾지 못한다. 히카루는 막연하게 자신이 사이에게 바둑을 두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사이가 사라진 것이라고 믿으며 바둑을 더 이상 두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히카루와 같이 바둑 원생이었던 '이스미'의 이야기를 갑자기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이 재미 없어서 빨리 넘기면서 봤다.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이스미의 바둑> 편!


이스미는 프로 시험에서 히카루에게 졌던 경험을 갖고 있다. 바둑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실수로 잘못 둔 바둑돌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자리로 옮겼기 때문이다. 바둑에서는 이미 둔 바둑돌을 옮기면 반칙패를 당한다. 히카루는 이스미의 반칙을 말할까 고민하고, 이스미는 히카루에게 들켰을까 걱정하다 결국 패배를 인정한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발현된 치졸함, 그 순간의 치졸함을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양심적인 고백 이후에도 털어내지 못한 수치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스미는 그 수치스러운 과거를 털어내기 위해 바둑을 그만 둔 히카루를 찾아간다. 이전에 두지 못한 바둑을 두게 해달라는 것이다. 히카루는 사이 때문에 망설이다 이스미를 위해 바둑을 두기로 한다.


'이스미의 바둑'은 히카루의 깨달음 때문에 인상 깊다. 히카루는 바둑을 두면서 자기가 바둑을 얼마나 그리워 하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사이의 환영을 본다. 자신의 바둑 안에 사이의 바둑이 들어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글로 쓰다보니 유치하게 읽히지만, 히카루가 바둑을 두는 순간 사이의 부채가 히카루의 손과 겹치는 장면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이후 히카루는 사이의 바둑을 이어간다. 사이의 뜻을 이어 신의 한 수를 추구하기로 하는 것이다. 고대 바둑 기사이자 히카루의 스승인 사이는 히카루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바둑에 관한 만화가 인생에 관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개인의 삶은 인류의 역사에서 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잇는 것 또한 그 점인 개인들이다. 사이의 바둑은 히카루의 바둑으로 이어졌고, 히카루의 바둑은 이스미의 바둑으로 살아났으며, 히카루의 전진은 또다른 라이벌의 바둑으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개인의 삶이 얽히고설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개인의 삶은 인류의 큰 줄기를 만들면서 의미 있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한 이유다.




여기부터가 본론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어떤 줄기에 포함되어 있는 걸까? 이 질문에서 나는 드라마 <미생>의 "나의 영웅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그래는 자신의 줄기였던 바둑을 포기하고 상사맨이 되기로 한다. 자신이 뜻을 이으려던 영웅들은 상사맨의 영웅이 아니다. 그래서 그 영웅들은 장그래로부터 멀어져 간다. 자신이 이으려던 줄기를 포기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영웅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존경하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을.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존경하는 소설가들이 있었다. <보바리 부인>의 귀스타브 플로베르, <롤리타>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성>의 프란츠 카프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 나의 영웅들이다. 힘들 때마다 이들의 책을 찾아보며 감탄했다. 언젠가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영웅들이 내게서 사라져 간다. 나는 면접장에 가서 나의 영웅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망설이는 순간들을 맞이 한다. 영웅들의 책에서 멀어져 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 영웅들과 멀어졌다고 느낀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동안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언젠가 다시 나의 영웅들 뒤를 따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당장 텅 빈 주변을 보면 의지할 곳이 사라졌다고 생각돼서 어딘지 허전하다. 이제는 장그래의 눈물 한 방울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39. 감각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