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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pr 25. 2024

서산 황금산에서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해 보자!

 “여보! 천천히, 천천히 힘들지 않은 코스로 가야 돼요~ 알았지요?”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요.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여행을 가기 전 남편과 나의 대화이다. 평소 남편은 장거리 여행, 난이도 있는 코스를 가기를 좋아한다. 요즈음 나는 체력이 많이 약해져 있어 남편의 행보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랑 함께 갈 때는 쉽고 편안한 일정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퇴직을 앞두고 퇴직 후의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먼저 방방곡곡 국내 여행을 하고 세계여행도 맘껏 해야지.

요즘 한 달 살기가 유행이던데 어디가 좋을까? 해외를 이곳저곳 일 년 정도 돌아다녀 볼까?.

 나의 버킷리스트는 종이 한 면이 금방 가득 찼다.

 

    하지만 막상 퇴직하고 맞이하는 날들은 생각과는 달랐다. 바쁘게 살아오면서 나를 버티게 만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예전에 없었던 병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갑자기 허리가 몹시 아파져 병원에 갔다.

“근력이 약해져서 그래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어느 날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몹시 아팠다. “족저근막염입니다. 많이 걸으시면 안 돼요.”

  이런저런 건강 문제들이 존재를 드러내며 나를 힘들게 하였고 기대로 가득 찬 버킷리스트들은 허무하게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서산 황금산은 높이 156m 정도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고 길이 잘 조성되어서 걷기가 편해요. 특히 해안의 바다 풍경이 멋지고 ‘코끼리바위’가 유명하답니다. 서해안을 따라 바다를 감상하면서 드라이브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요. 산행도 ‘가볍게’하고 코끼리 바위 옆에서 사진도 멋지게 찍도록 합시다.” 5개월이 되어 가는 데도 낫지 못한 ‘족저근막염’때문에 우울해져 있는 내게 남편이 위로하며 여행 일정을 말해주었다.

 

   가는 길에 있는 박물관에 들러 관람하고 황금산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조금 넘었다. 황금산 주변은 가건물로 세워진 식당들이 드문드문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주차장은 무척 넓었다.  눈앞에는 서해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져있어 마음이 확 트이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창가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가리비 구이를 주문하였다. 싱싱한 가리비가 불 위에서 구워지며 껍질이 ‘탁탁’ 튀며 벌어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육수가 가득 찬 잘 구워진 가리비가 통통한 자태를 드러내며 식욕을 당기게 하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 남편이 갑자기 주인에게 묻는 것이 들렸다.

  “지금 물 때가 어때요?”

 “네, 이제 물이 빠지는 중이네요.”

 주인의 대답을 듣고 난 후 남편이 내 의견을 물었다.

 “산을 바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해안가를 통해서 코끼리 바위로 가보는 것이 어때요? 지금은 썰물이라고 하니 해안가를 걸어서 갈 수 있어요. 내가 미리 몇 번 다녀본 길이라 잘 알아요.”

“그래, 해안가로 가면 풍경이 멋지겠네. 그렇게 해요”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한 해안 길은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식당에서 본 해안은 분명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산을 끼고 돌아서자 바로 거친 바윗길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여서 해안 길을 이루고 있었고 물기가 있어 미끄러웠다. 바닷가 가까이 있는 바위들 표면에는 자연산 굴이 가득 붙어있었다. 밀물 때는 이곳이 다 잠겨있었을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은 아름다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산의 사면이 절벽이었다. 조그마한 산에서 이런 위용이 있다니 감탄스러웠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차분히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손과 발을 다 사용하여 오르내리며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버벅거리며 걷다 보니 내가 한심해 보였다. 등산을 많이 다녔던 내게 이런 바윗길은 원래는 전혀 어려운 코스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암릉을 오르는 것을 좋아했던 씩씩한 여성이었는데, 왜 이리 겁이 많아지고 둔해져 버린 것인지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잠시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주변은 남편과 나 둘뿐 아무도 없었고 적막함만 가득 찼다. 무심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바위 끝에 갈매기 한 마리가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게는 ‘아, 오늘도 고단한 하루가 끝났네. 이제 좀 쉬어야지...’ 하고 안도하는 것 같아 보였다. 새의 시선을 따라 나도 함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평화로웠고 윤슬이 물결 따라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바위에 조용히 앉아 있으니 잡념이 사라지고 맘이 편안해졌다. 행복한 고요의 시간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드디어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걸을 수가 없어 주저앉아버렸다.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 보였다.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내가 힘들게 걸어왔던 바윗길이 약간은 억울한 느낌이 드는 조그만 자갈들만 가득한 작은 몽돌 해변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내가 보았던 멋진 풍경들은 보지 못했잖아' 하고 위안을 하였다.

코끼리 코 모양같이 생겼다고 하는 코끼리 바위 옆에서 인증 사진도 찍고 조금 쉬다가 등산로를 통해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등산로는 잘 조성이 되어 있고 걷기가 쉬워서 금방 내려올 수 있었다.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갔던 하루 일정이 끝이 났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비록 남편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다녀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뿌듯하다. 오랜만에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성취하는 기쁨이 있었다.

 “잘했고 고생했어” 스스로를 칭찬해 주었다.

 

 “여보! 처음 한 말과 다르잖아요, 편한 길로 간다고 하고선!!” 하고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남편은 그렇게 내가 힘들어할 줄 몰랐다며 달래듯 변명했다.

 “그래도 잘 다녀왔잖아요, 등산로만 왕복하는 것은 너무 단순해. 해안 길도 경험해 보는 것이 좋아요 ”

 “그렇긴 해, 나도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재미있긴 했어” 나는 결국 남편을 보고 웃고 말았다.


  그동안 건강상의 문제로 나를 너무 위축되게 했던 것 같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다시 찾아왔다. 나의 용기도 찾아왔다. 그래, 자신감 있게 하나씩 실천해 보자. 즐겁게 살아가도록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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