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배나무가 한그루 있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기둥이 굵지않고 키도 아담하다. 나이가 많은 노목이라 늘 안쓰러워 하는 녀석이다. 이 배나무는 한창 더운 여름의 한복판, 7월 말에 배가 익는다. 보통 한국에서는 배 라고하면 추석이 생각나는 가을과일로 떠올리는데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우리집 배나무는 복숭아가 한창 나올때 같이 익는다.
올 추웠던 봄, 나무 주변에 거름을 주었는데 그 덕일지 그 작은 몸통으로 꽤나 주렁주렁 배를 열렸다. 이 노목이 열매를 맺어내는 것이 미안하지만 그 배맛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자연의 신비로움이다.
올여름에 비가 적게와 걱정했으나 유난히 뜨거운 햇살덕인지 배 맛이 무척이나 달다. 나는 7월 중순쯤 부터 아침마다 배를 하나씩 따서 맛을 보았다. 내 파트너는 떨어지는 배가 있으면 다 익은것이라며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아침마다 배나무 곁으로 가 과일을 만져보며 하나씩 따 맛보았다. 파트너는 정작 배가 다 익었을 시점이면 수확할 배가 몇개 남아있지 않을 거라며 그만 따먹으라고 했지만 언제 익을지 자꾸 맛보고 싶은 것을 어찌하랴.
이탈리아어로 배는 페라 Pera (단수형) 페레 Pere (복수형) 라고 부른다. 서양배라고 알려진, 조롱박처럼 작고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붉으스름한 것도 있고 녹색이다 점점 노랗게 익는 것도 있고 종류가 여러가지다.
딱딱한 배를 집에 며칠 놔두면 후숙되며 말캉말캉 육질이 부드러워지는데 그 맛이 아주 달고 부드럽다. 한국배가 시원하고 아삭하다면 이탈리아의 배는 달고 부드럽다.
과일로 그냥 먹어도 맛있고, 하나의 콤비인 초콜렛과 배를 넣어케이크로 만들어도 맛있으나, 내가 좋아하는 배 먹는 방법은 치즈와 곁들이는 것이다. 나는 부드러워진 배를 깎아 그위에 고르곤졸라 치즈나 산양치즈, 호두를 올려먹는다. 단맛의 배와 짜고 퀴퀴한향의 치즈가 그렇게 찰떡으로 어울릴 수 없다. '배와 치즈' 생각이면 늘 입에 침이 고인다. 말랑한 Asiago 아지아고 치즈나 풍미강한 Taleggio 탈레지오 치즈도 좋다. 개인적으로 지방이 가득한 찐득하며 크리미한 치즈면 나는 깎아놓은 배 위에 일단 올리고 본다.
치즈와 배맛에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다. 아침마다 못참고배맛을 확인하는 이유는 바로 그 설레임에 있다.
여름의 중턱에서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가며 뜨겁게 달궈지는 배맛. 그리고 올해도 열매를 열어주고 견뎌낸 배나무에 감사인사를 전할때쯤이면 이 더운 여름도 지나갔으리라. 그리고 다시 일년을 기다리며 배와 치즈를 설레게 생각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