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학교 앞에는 하교 시간에 맞춰 오리나 병아리를 팔러 오는 장사치들이 가끔 진을 친다.
“엄마, 학교 앞에 병아리 팔아요. 몇 마리 안 남았어요. 사고 싶어요. 빨리 돈 주세요.”
아이는 눈을 반짝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한다. 병아리가 다 팔려나가기 전에 사야겠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다. 돈을 받고 쏜살같이 달려갔던 아이는 병아리 몇 마리에 세상을 다 얻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골판지 상자에 신문을 깔고, 좁쌀과 물을 넣어주고, 병아리가 춥지 않게 백열전구를 켜주는 일은 모두 남편 담당이다. 아이의 손을 많이 탄 병아리는 며칠 내로 죽기도 하지만, 몇 마리는 중닭의 모습이 되도록 꽤 크기도 한다. 아이가 셋이니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이 되곤 했다.
아이들의 관심은 단지 병아리에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오리가 되거나, 십자매 한 쌍, 햄스터, 식용 달팽이, 장수풍뎅이, 올챙이, 송사리, 열대어, 고양이 등 꽤 종류가 다양하다. 아이의 관심은 단지 며칠뿐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잃은 생명을 돌보는 일은 자연스레 늘 남편의 몫이 되었다. 생명 있는 것을 돌보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는 내게 무언가를 기른다는 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아서 가끔 그들을 돌봐야 하는데 그건 매우 귀찮은 일이다.
“엄마, 강아지 키우면 안 돼요?”
아이들이 좀 크자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다.
“응, 안돼.”
“왜요?”
“너희들은 크면 스스로 씻고 볼일 보지만 강아지는 죽을 때까지 해줘야 해. 정 키우고 싶으면 나중에 네가 커서 독립하면 그때 길러. 나는 너희 셋 키우기도 벅차.”
나는 그런 말로 아이의 요구를 싹둑 자르곤 했다. 아이들이 성장하자 이제는 더는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말을 안 한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 선물로 들어온 화분도 몇 달이 못 되어 고사시키기 일쑤였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반려동물은커녕 흔하디 흔한 화분 하나 없었다. 집에 초록색이 없으니 삭막하게 느껴져 아파트 장날에 노란색 카랑코에 화분을 하나 샀다. 살 때 분갈이를 해서 다른 화분보다는 오래갔지만, 결국 그마저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작년 가을의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새싹 보리를 만났다. 성인병 예방, 숙취 해소, 다이어트, 당뇨 개선, 체내 독소 제거, 장 건강, 콜레스테롤 감소라는 효능보다 눈길을 끈 건 초록색의 싱싱한 잎이었다. 빨간 머리 앤이 마음껏 뛰놀던 초록의 들판으로 보였다. 전염병으로 외출도 자유롭지 않은 분위기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 듯한 초록이었다. 키우기 쉽다는 블로거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당장 부엽토와 새싹 보리를 주문했다. 새싹 보리를 심을 스티로폼도 마련했다. 준비한 스티로폼에 부엽토를 붓고, 불린 새싹 보리를 심기까지는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막상 도착한 재료들을 보자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을이 더 깊어져 추워지면 싹틔우기도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행동을 이끌었다. 20kg이나 되는 부엽토를 낑낑거리며 들어 올려 필요한 만큼 스티로폼에 붓고, 전날 불려두었던 새싹 보리를 심었다. 햇볕 잘 드는 베란다에 놔두고 물도 듬뿍 줬다. 이틀째까지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실패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쯤 새싹 보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 초록 초록한 것이 어찌나 이쁜지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는 것 같은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다음날, 새싹 보리는 전날보다 두 배는 성장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이파리 끝에 부엽토가 붙어 있는 게 드문드문 보였다. 살아있는 건 힘이 세다. 씨앗은 자기 무게의 20만 배에 해당하는 땅의 압력을 뚫고 싹을 틔운다고 한다. 새싹 보리는 부엽토에 심었기 때문에 그보다는 더 쉽게 싹을 피웠겠지만, 새싹 보리 입장에서는 그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압력이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도 초록의 싱그러움이 가득 채워졌다. 스티로폼 가득 자란 새싹 보리를 보며 초록의 들판을 상상했다. 숨쉬기가 편해지고, 전염병에서 조금이나마 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마다 자라나는 새싹 보리를 보며 나도 성장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한 달 전, 지인의 집에 방문했다가 주방에 놓였던 스킨답서스를 선물 받았다. 네모진 유리 화병에 수경재배로 키우던 거였다. 아무리 마이너스의 손이라도 키우는데 힘들지 않을 것이라며 준 것이다. 스킨답서스는 몇 년 동안 키웠던 적이 있다. 우리 집에 와서 최장수 생존 기록을 세운 식물이다. 치렁치렁하게 줄기가 늘어지면 이발하듯 잘라냈다. 그러다가 질려서 버려버렸다. 선물 받은 스킨답서스는 작아서 당분간은 안심하고 길러도 된다. 몇 개월 전 만든 디쉬 가든 옆에 스킨답서스를 놓았다. 디쉬 가든에 심긴 이름 모르는 식물이 친구가 생겨 그런지 더 잘 자란다. 나란히 자리한 두 화분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