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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Feb 08. 2022

높은 곳

            

무서운 곳 너무 많지, 너무 많아. 가령 빛이 너무 없는 곳이라든가, 빛이 너무 많은 곳. 빛이 너무 없는 곳에선 너를 잃을 것 같고, 빛이 너무 많은 곳에선 나를 잃을 것 같아. 혹은 너무 넓은 곳이라든가, 너무 좁은 곳. 너무 넓은 곳에선 내가 밖을 향해 터질 것 같고, 너무 좁은 곳에선 밖이 나를 향해 터질 것만 같아. 

무서운 곳이 너무나 많지, 너무나 많아. 가령 속도가 너무 빠른 곳이라든가, 너무 느린 곳. 너무 빠른 곳에서는 나만 홀로 심장이 멈출 것 같고, 너무 느린 곳에서는 나만 홀로 심장이 뛸 것만 같아. 혹은 너무 시끄러운 곳이라든가, 너무 조용한 곳. 너무 시끄러운 곳에선 난 이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너무 조용한 곳에선 난 이제 말을 멈출 수가 없을 것만 같아. 

하지만,     


가장 무서운 곳은 높은 곳이다. 반박 안 받는다. 어두운 곳? 아니. 밝은 곳? 아니아니. 넓은 곳? 노. 좁은 곳? 노노. 빠른 곳? 놉. 느린 곳? 놉놉. 시끄러운 곳? 농. 조용한 곳? 농농. 그 어느 곳도 아니다. 높은 곳이 가장 무서운 곳이다. 가장 두려운 곳이다. 가장 떨리는 곳이다. 아니라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아닌 사람도 있겠지. 반박 받는다. 양보한다. 너는 모르겠고, 나에겐 그렇다. 나에게 가장 무서운 곳? 그 어떤 곳도 아니다. 가장 무서운 곳은 높은 곳이다.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높은 곳에 오르질 못했다. 두 분의 꿈이었던 2층집을 마련한 부모님은 1층에 살림을 틀어야만 했다. 왜? 내가 6살이나 먹고도 2층 계단을 혼자 오르지 못했으니까. 2층집의 2층에 살고 싶어 했던 부모님의 꿈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혼자 몇 계단씩 올라가보는 연습을 했다. 

높은 곳에 오르질 못했다. 친한 친구들은 어지간해선 정글짐에서 술래잡기를 하지 않았다. 왜? 같은 무리 중 하나인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정글짐 상단까지 올라가질 못했으니까. 그래도 의리가 있던 친구들은 평지에서나마 같이 술래잡기를 함께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밖에 나가 놀지 않게 되었다. 

상상을 하니까 무서워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그런데 어떻게 상상을 안 해? 계단에서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상상, 정글짐의 봉에서 발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상상, 떨어질 때 두 다리 사이로 봉이 낀다면, 세상에, 이런 상상을 어떻게 안 해? 균형을 잃는다면, 발을 헛디딘다면, 미끄러진다면, 무너진다면, 내가 그곳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럴 리 있는 것보다 그럴 리 없는 것에 대한 상상에 더욱 익숙한 것 아니었나?

나이를 먹어가며 공포심의 정도는 어느 정도 옅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내게’ 옅어진 수준일 뿐 남들에 비해선 매우 진했다. T.O.P.였던 유년기에서 그냥 커피가 된 정도랄까…. 육교보다는, 둘러가더라도 횡단보도를 선호하지. 아파트 23층인 친척 집에서 베란다 근처를 가보지 못했어. 놀이동산만 가면 초라한 애인이 되고 말았네. 홍콩 여행에서 탔던, 바닥이 유리로 된 케이블카에선 정말이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풍경 따윈 보이지 않아, 오직 하늘이 노랄 뿐. 어쩌면 바지마저 노래질 뻔했다. 

하지만 점점 그럴 리 없는 것보다 그럴 리 있는 것에 대한 상상을 더 많이 하려 노력했고, 난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잃더라도 다시 균형을 찾을 것이다, 난 발을 헛디디지 않을 것이다, 헛디디더라도 손으로 무언갈 잡으면 된다, 이 기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발생하더라도 무언가 안전장치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조금 더 높은 곳을 오를 수 있었고, 조금 덜 무서워 할 수 있었고, 한 층 한 층 더 오르며, 조금 더 그럴 리 있을 만한 삶을 

살다가,     


그럴 리 없을 만한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떨어졌다…. 아니, 뛰어내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나랑 다르게 겁이 없었던 사람이, 나 때문에 2층집에 살지 못해 날 원망했던 사람이, 나랑 달리 정글짐에서 날아다니던 사람이, 놀이동산의 최난도 어트랙션을 즐기던 사람이, 항상 낮은 곳에 살아 높은 곳을 꿈꾸던 사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주가 그래프를 보며 흐믓해 하던 사람이, 올라가고 싶어 하던 사람이, 낮은 곳이 싫었던 사람이, 그래서 결국 높은 26층에 신혼집을 차린 사람이, 살다가, 살다가, 혹은 견디다가, 살다가, 그 26층에서, 떨어졌다…. 아니, 뛰어내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무섭지도 않았니, 그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것이. 무섭지도 않았니, 그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동안. 무섭지도 않았니, 낮은 곳에 도착하면 생기게 될 일이. 무섭지도 않았니, 당신이 그렇게 가버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이후의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혹은 이 질문들이 다 무용할 만큼, 그 높은 곳이 무서워졌던 것이니. 높은 곳이라곤 무서워하지 않던 사람이, 그래서 높은 곳을 오르고자 했던 사람이, 그래서 높은 곳에 살게 된 사람이, 그땐, 높은 곳이 가장 무서웠던 거니. 견딜 수 없었던 거니. 그래서 그렇게 낮은 곳을 향해, 낮은 곳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해,

또다시,     


낮아졌다. 우린 낮아졌다. 몸이 낮아졌다. 마음은 더 낮아졌다. 눈길은 더더욱 낮아졌다. 높은 곳을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무서운 곳? 많지 많아. 밝은 곳부터 어두운 곳, 넓은 곳부터 좁은 곳, 빠른 곳부터 느린 곳, 시끄러운 곳부터 조용한 곳까지, 그리고 이제 무엇보다……. 높은 곳은 다시, 이제 그 어디보다 무서운 곳,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무서운,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높은 곳의 반대말은 낮은 곳이 아니라 깊은 곳. 깊은 곳은 그 어디보다 슬픈 곳. 당신이 파고들어간 그 깊고 깊은 곳은 우리에게도 깊고 깊은 곳, 헤어나오기 힘든 곳, 너무 깊어서 어두운 곳, 좁은 곳, 느린 곳, 그 어디보다 조용한 곳, 너무나 조용해서 마음이 시끄러운 곳, 우리에게만 시간이 느려 모든 것이 빠른 곳, 너무나 우리의 마음이 좁아 바깥세계는 너무 넓은 곳, 너무나, 너무나 이렇게 어두운데 모두가 이젠 좀 제발 밝아지라고 말하는 곳……. 그곳에서 우린,

살아가야만,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반박 안 받는다. 살아갈 것이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글처럼, 우리 가족의 삶의 마무리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써내려간 이 글처럼,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갈 것이다. 그럴 리 없는 일은 그럴 수 있었던 일이라고 여기며, 균형이 흐트러졌으니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으니 난간에라도 지탱하며, 난간이 다시 난간(難艱)이 되어, 또 무너지더라도, 또 쓰러지더라도, 서로에게 기대며, 울며, 어떻게든 꾸역꾸역 그럴 리 있는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그럴 리 없어 보이니? 감히 상상하지 마. 상상하니까 우리가 측은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 있는 너, 거긴 어떠니? 이젠 깊은 곳이 무섭니? 이젠 깊은 곳이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닌지. 그래도 다시 올라오지 마렴. 넌 이제 깊은 곳에서 기쁘렴. 우린 이제 슬픈 곳에서 슬플게. 그리고 우리는 따로따로 놓여, 이 무서운 곳에서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우린 일단 살 거야   

  

너는 그냥 잘 있어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비 스위치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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