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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cilk Jun 05. 2017

걷는 자들을 위한 도시

파리, 기억의 공간들 #00 Prologue

2003.07.20 - 2003.07.22
첫번째 파리



파리는 걷는 자들을 위한 도시다. 대학생 시절 떠난 배낭여행의 끄트머리에서 처음 만난 파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가이드북을 꼼꼼히 예습하고 일행들과 함께 10장짜리 까르네를 나누어 가졌지만, 결국 지하철을 타기보단 걸어서 이동한 적이 더 많아 까르네는 남아서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겨우 사흘, 아니 정확히는 이틀하고 몇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파리는 걷기만 해도 충분한 도시였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또 항상 그리워하는 파리의 이미지는, 첫 유럽 배낭여행의 마지막 도시였던 파리에서 일행들과 헤어져 처음으로 혼자 걸었던, 조용하고 또 아름다운 도시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늘 파리로의 여행을 꿈꾸고 파리를 그리워해왔다. 일상에 지쳐 낯선 곳에서 걷고 싶어질 때면 항상 파리부터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다. 걷기에 불편함이 없고 걷는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 노트르담에서부터 센강을 따라 걷다 보면 퐁네프가, 퐁데자르가, 루브르가, 튈르리 정원과 콩코드 광장이, 그리고 샹젤리제와 개선문으로 이어지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도시.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아닌 도시의 풍경이 치유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도시가 파리였다.




2010.09.05 - 2010.09.12
두 번째 파리


2010년 9월, 파리로의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겨우 두번째였으면서, 그 때 나는 마치 고향에라도 가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두 번째로 파리에 방문했을 때부터 나는 헤맬 확률이 좀 더 낮은 지하철을 과감히 버리고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타고 가다가 언제든 내려서 걷기 위해서였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상하게도 2010년에는 파리가 마치 오랜만에 찾은, 어릴 적 살던 동네 같았다. 그냥 대충 기억나는 대로 혹은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면, 그 사이 아무리 많은 것이 변했다 할 지라도 금세 내가 아는 건물이나 길이 눈앞에 나타나는, 그런 익숙한 도시처럼 느껴졌다.


겨우 두 번째 방문, 그것도 처음 갔을 때 머물렀던 시간은 이틀하고 몇 시간 남짓이 다였다. 게다가 그것은 무려 7년 전의 일이었으니, 파리를 얘기하면서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 같은 도시라는 건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실제로 2010년의 파리는 내게 그랬다. 매일 아침 24번 버스를 타고 노트르담 앞에서 내리면 그때부터 하루종일 지도를 거의 꺼내보지 않았다. 센강을 따라 걷다보면 익숙한 다리들이 나오고, 금세 루브르가, 오르세가 나올 테니까. 7년 전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인 그 모든 길들이 크게 변하지 않고 여전히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나는 파리가 너무 익숙했다.



두번째 파리.
나는 가이드북도 지도도, 심지어 카메라조차 꺼내기 귀찮아서 그냥 눈에 익은 길들, 눈앞에 보이는 길들을 걷고 또 걷는 여행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엔 몰랐던 곳이나 가보지 못한 곳보다는 가봤던 곳, 지난 기억이 떠오르는 곳들을 다시 찾는 것으로 여행의 하루하루가 채워져 갔다. 예전에 다 찍은 풍경인데 똑같은 풍경을 또 찍어서 뭐하나 생각하며 사진도 별로 찍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 나는 조금 지쳐 있었고, 파리에서 "여행"을 하기보다는 "일상"을 살아보고 싶었던 것 같다.

별다른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행.
그저 매일 아침 24번 버스를 타고 노트르담 앞에서 내리기만 하면, 거기서부터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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