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가나 소중한 그 이름, 가족
나에게 '한국의 가족'을 상상해보라 하면 떠오르는 구성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있고, 그 가운데에 적으면 한 명에서 많으면 세 명 정도의 자녀가 서 있는 모습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더 많은 자녀들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나와 우리의 부모세대가 다른 것처럼 시대에 따라 그리고 나라에 따라 상상되는 가족의 형태와 수는 다를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의 가족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설을 하나 꺼내면, 나는 아버지가 조금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찍힌 사진은 내가 매우 어릴 적의 것 뿐이다. 나이가 지긋이 든 부모님과 성장한 자녀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어릴 적에 찍은 가족사진만 보아도 여러 의미에서 위로가 되었다. 그런 내가 현지인 가정에 초대받아 방문할 때마다 그 집에 없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이 가족사진이었다. 사진관에서 멋진 옷을 입고 찍은 사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찍은 사진을 집마다 걸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나에게는 성능이 좋지는 않지만 잘 작동하는 작은 카메라가 한대 있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가족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가족사진을 찍는, 이른바 일일 가족사진관을 운영한다는 광고를 냈고, 며칠이 되지 않아 제법 많은 가정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의사를 전해왔다. 아내와 나는 나무판자에 은박지를 붙여 반사판을 만들고, 장의자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해 소박한 야외 사진관을 만들었다.
사진 찍는 날이 되었고, 시간이 되자 가족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손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이 시간이 보람도 있었지만, 마다가스카르의 가족에 대해 많이 보고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현지인 가족의 특징들을 몇 가지만 들어보자면, 첫째로 '많은 자녀'이다. 한 엄마당 적어도 네다섯 명 이상의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다. 아이가 많다는 것을 엄마들은 상장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녔다.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 또 알아보니, 아이를 갖고 있다는 것과 최근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출산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이며, 여성적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아이가 많은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숨은 동기가 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여성들이 매우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마을을 지나다니면서, 나이가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녀들의 대부분이 사실 그 돌보던 아이들의 엄마였다. 엄마가 낳은 막내와 딸이 낳은 첫째의 나이가, 즉 이모와 조카의 나이가 비슷한 것이다. 엄마의 자녀들이 모이고 그 자녀의 자녀들도 함께 섞여 3대가 사진을 찍는 경우에, 대체 누가 엄마고 할머니이고 언니이며 동생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운 가정이 많았다. 그만큼, 세대 사이의 나이 차이가 거의 없었다.
셋째 특징은 아버지의 부재이다. 열 가정중 아홉 가정은 가족사진을 찍는 데에 아빠가 오지 않았다. 낮에 일을 하느라 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정 자체에 아버지가 없었다. 그 이유를 따져본다면 아버지가 멀리 있든지, 아예 없든지 이 두 가지이다. 멀리 있는 아버지들의 경우는 지방에 있는 광산 같은 곳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내려가 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돈도 아니고 석탄 같은 것을 한 자루씩 집으로 보내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그러다 일 년,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오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정식 혼인의 절차를 밟지 않다 보니, 아이만 임신시키고 그냥 집을 나가는 남자들의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한 여자에 그런 남자가 몇을 거쳐가니 한 엄마에 아이만 많고 아빠가 없는 가정이 많은 것이었다. 물론, 아빠가 온전히 존재하는 가정도 있으며 실제로 상황이 그러한지 모든 가정에 일일이 물어보며 확인은 하지는 못했다. 이후에 내가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인 탄자니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한 현지인 초등학교 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나와 함께 방문한 한국인 친자매 둘에게 아무렇지 않게 한 질문이 '너희 둘이 아버지가 같니?'였다. 이 질문을 풀어보면 '너희 부모님 이혼했니? 그리고 너희 같은 아버지의 자식이니? 어머니만 같은 거 아니고?'하는 내용이었다. 그 교사 자신도 전 부인이 낳은 자신의 아이가 있으며, 지금 살고 있는 부인과 낳은 아이도 있는 상태였다. 새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흔히 있는 가정의 형태라는 것이 그 교사의 설명이었다. 나라가 다르고, 경우가 꼭 같다고 할 수 없지만 마다가스카르의 상황을 탄자니아의 그것에 비추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마지막 특징은, 표정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은 경우, 카메라에 익숙하다. 사진에 찍힐 때, 어떤 표정과 자세를 취해야 할지 어색할지라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에게 '사진 찍히는' 행위는 익숙하지 않다.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고, 자신이 찍힌 사진을 본 사람들도 거의 없다.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취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전문 사진가가 아니었고, 언어도 잘하지 못했다. 내가 사진기 앞에 선 어색한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미 치키치키~'(웃으세요~) 밖에 없었다.(얼마나 그 말을 많이 했던지, 이후에 내가 길을 지나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미 치키치키~'하며 나를 놀릴 정도였다.) 이렇게 한 가족씩 사진을 찍음에 따라 정말 놀라가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아이의 표정은 엄마의 표정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웃어달라고 해도 끝까지 웃지 못하는 아이들과 엄마가 있었고, 단 한 번에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 엄마와 아이들이 있었다. 가정에 아버지가 있는지, 아이들이 어떤 가정 교육과 환경 안에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단지, 엄마의 표정을 따라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12월 초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아프리카는 12월이 베리베리 핫한 여름이다.), 일일 가족사진관은 짧은 개장과 함께 성공적으로 문을 닫았다. 예쁘게 사진을 보정하고(아프리카 사람들도 얼굴이 밝고 흴수록 예쁘다고 생각한다.),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인화소를 찾아가 사진을 인화해서 엄마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진을 들고 기뻐하는 엄마들을 보며, 그 사진이 아마도 생애에 첫 가족사진이겠지만 마지막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한데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행복한 순간이다. 누군가는 늙고 다른 이는 성장했을 어느 시점에, 다시 가족이 모여 또 사진을 찍고 내가 찍어준 사진과 비교하며 그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나도 이제는 가족이 있다. 사랑하는 이의 남편이 되었고, 소중한 아이의 아빠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허락된다면, 우리와 같은 웃음을 우리의 아이가 가져주기를, 그 행복했던 마다가스카르의 가족들과 같은 한 장의 행복을 기억할 수 있기를, 시간이 흘러 각자 새로운 삶의 시점을 맞이했을 때에 다시 또 지금의 행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우리 가족의 첫 사진을 보고 싶은 그 땅의 엄마들에게 꼭 보내주고 싶다. 우리들도 당신들과 같이 행복한 순간에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