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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Jun 09. 2019

순수하고 간절한 용기

아이들을 핑계삼아 잃어버린 나 다움을 생각하다.

 요즈음 학교에 찾아가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집니다. '세계시민교육' 덕입니다. 국제개발협력NGO에 근무하는 저로서는 시대가 허락한 좋은 시간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세계시민'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용들이 동의되고 인정되고 증명되어야 할까요. '세계시민'이라는 트렌디한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 이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뻔하면서도 무거운 질문이 가장 깊은 곳에 깔려 있습니다.



 나름 준비한 내용을 들고 수업에 나가지만 깜짝 놀라는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을 통해 나를 다시 들여다 보기에 그렇습니다. 어린 학생들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삶에 시간이 더해지면 성숙이라 부를지 모르겠으나, 순수함에서도 한걸음 멀어지는듯 합니다. 오래된 칼은 견고할지 모르나, 예리함은 떨어지듯 말입니다.
 하루는 초등학생들과 만났습니다. 미래에 나에게 벌어졌으면 좋겠는 일을 포스트잇에 적고, 서로가 무엇을 적었는지를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미래 사건들이 바로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발표 전에 충분히 적어보는 시간,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더니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소원을 적어도 되요?"
 초등학생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래에 벌어졌으면 좋겠는 일과 '소원'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맥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리 하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지요. 발표도 하기 전에 서로가 적은 내용을 두고 키득거리며 즐거워하던 중, 다시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재혼이 뭐에요?"
 처음 질문한 학생이 적은 내용을 슬쩍 확인해 보니 '엄마, 아빠가 재혼하게 해주세요.' 라고 또박또박 적혀있었습니다. 순수하게 적어내린 소원을 확인한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교실에 순간 수근거림이 일어났습니다. ‘재혼’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아는 학생들이 있었으니까요. 재혼은 ‘이혼’을 전제한 단어이며, 이혼은 깨어진 가정, 비정상적인 가정, 나와는 다른 가정 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수근거림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괜찮아~ 선생님 어머님도 재혼했어~ 이제 서로 쓴 내용을 발표해볼까?”
이렇게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미래형이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쪽지는 붙어있었으나, 정작 발표시간에 ‘재혼’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수업을 여러번 진행하다보니, 다양한 학생들이 가진 사연을 알게 됩니다. ‘처음으로 진짜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라는 내용을 썼다가 지우개로 열심히 지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볼때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학생 입장에서 진정한 친구는 아직 생기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해보면 힘든 상황이 있었는지도 모르구요.
 이후, 어린 아이들을 보면 간혹 울컥합니다. 저 작은 체구 안에, 우리가(혹은 제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순수함 혹은 밝음 이라는 단어 뒤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숨어 있을까요?




 다수와 다른 환경 혹은 조건을 가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누군가는 간혹, 환경을 원인삼아 사람을 결과지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같은 고민을 갖습니다. 그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요. 혹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고, 다르게 보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보인다면, 그 문제가 시각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다름이 주는 겨로가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그으며, 옳고 그름을 잽니다. 문제를 찾기 위해서라지만 없던 문제를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깨진 유리창을 발견하면 고쳐야하지만, 세모난 유리창을 깨졌다고 할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용기있게, 혹은 간절한 마음으로 펜을 든 그 학생들에게도 이는 낯선 경험이 아닐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형성되어버린 나의 환경이 나를 내가 아닌 누군가로 혹은 어떠한 속성이 부여된(대부분은 부정적일) 존재로 규정하니까요. 남이 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 순수한 바람을 적어낸, 혹은 시도한 아이들에게 이제와서 마음으로나마 묵묵히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두손을 부여잡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 있는 그 아이들을 위해 그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 기도는 어쩌면, 아마도 나를 위한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수한 아이들을 핑계삼아,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나 다움이란 무엇인지 잠잠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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