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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Aug 13. 2019

꿈을 꾸었다.

언제인지 모를 학창시절로 돌아가, 본적 없는 외국인 선생님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혹은 중학교였을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아니었다. 교복을 입고 있었고 교실에 앉아있었다. 수업이 시작되려는 순간인듯 했다. 반장이 나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부르시니 가보라고 했다. 나는 교실을 나와 담임 선생님이 있는 장소로 가고 있었다.


교실을 나오고 몇걸음 지나지 않아, 다른 교실 뒤에 앉아있던 외국인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손에는 몽둥이 대용으로 쓸법한 지시봉(?)이 들려 있었다.


“너 어디가?!”

“저희 담임선생님이 부르셔서요. 선생님께 가고 있어요.”

이에 외국인 선생님은 내가 매우 큰 잘못을 한듯한 비언어적 표현과 함께 이야기했다.

“학생은 수업시간에 돌아다니는거 아니야. 여기 무릎 꿇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학생은 수업시간에 돌아다니는거 아니야. 여기 무릎 꿇어.”

외국인 선생님은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다.


그 순간의 망설임이 찾아온 찰나, 잠에서 깼다. 잠은 깼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나는 내가 했어야 하는 문장들을 끝까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선생님, 학생은 수업시간에 돌아다니면 안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가고있는 중입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지 않아야 할 의무도 있지만, 저를 지도하시는 담임 선생님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저희 반 반장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반장에게 그리고 담임 선생님께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문장을 정리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착찹했다.


외국인 선생님이 한 말 중, 틀린말은 없었다. 단지, 다른 옳은 말을 듣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 만약, 실제 학창시절이었다면 나는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어야 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 학교에 있었던 쓰레기 학생주임 양쓰(양ㅇㅇ 쓰레기의 줄임말, 한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학창시절 선생님들을 다시 보게 된다. 그 사람의 행동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명확해 지는 것은 양쓰는 정말 쓰레기였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에게 ‘교사’라는 호칭을 부여했을까. 사립학교라 비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가 그랬다면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도와 리의 시작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에 나온 지금도, 사실 위와 같은 상황을 자주 마주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릎을 꿇어야 할 때가 많다. 나는 꿇지 않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꿇려 있는 형식이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선생님 말에 순종하지 않았으니 일단 잘못인 것일까.


묘한 꿈이다. 대체 외국인 선생님이 왜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말을 했을까. 유명한 그 누군가의 말처럼 꿈은 무의식의 발현일수 있겠다.


나는 언제쯤 상대방의 눈을 온화하게 바라보며 흥분치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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