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잔잔 Nov 03. 2020

겨울에 어울리는 금목서 향수

자꾸 킁킁거리게 되는 달달한 향의 정체

출처 : 무사시노 워크스 홈페이지 fragrance.co.jp

1.

탕수육을 찍어 먹는 사람과 부어 먹는 사람

길을 잘 찾아가는 사람과 길치인 사람

겨울에도 열이 나는 사람과 수족냉증을 달고 사는 사람

밥을 빨리 먹는 사람과 느리게 먹는 사람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


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자면 이처럼 끝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향수를 뿌리는 사람과 뿌리지 않는 사람. 특이하게도 향수는 홍해 바다가 좌우로 갈라지듯 아예 뿌리지 않는 사람과 늘 뿌리는 사람으로 나뉘곤 한다. 나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향수를 뿌려본 적도 없는 문외한에 속했다. 가족들이 개코라고 부를 정도로 냄새를 잘 맡아서 킁킁 거리며 새벽과 아침의 공기의 구분해내곤 했지만 어쩐지 향수에는 도통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가 한창 화장품에 관심이 많을 때에도 내 파우치나 책상에는 향수는 고사하고 데오드란트 조차 없었다. 그랬던 내가 향수에 한 발짝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쌀쌀해지는 계절로 넘어갈 때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달하고 황홀한 향기 때문이었다.


2.

그 향기의 근원지는 금목서라는 나무였다.

작은 묘목처럼 아담한 크기부터 열기구 풍선만큼 커다란 크기까지 자라는 금목서는 가을로 넘어가면서 작은 주황색 꽃이 다닥다닥 핀다. 이때가 바로 벌들이 모여들고 달콤한 향기가 퍼져 나오는 시기다. 쌀쌀한 바람과 가을 햇빛을 맞으며 길을 걷다가 나도 몰래 고개를 돌려 이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향의 정체를 찾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꽃향과는 또 다른 특이하고 매력적인 향이랄까. 금목서 꽃에서 나는 향은 오렌지 계열의 상큼함도 있으면서 농도가 짙고 고급스러운 단 향이다. 이 향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가을과 겨울 사이가 워낙 짧은 지라 향을 마음껏 맡을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또, 향을 담아가고자 꽃을 집에 가져가면 놀랍게도 그 풍성했던 냄새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나지 않는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향이 너무 좋아 알알이 달린 참깨 같은 꽃들을 소중하게 모아 집까지 가져가곤 했는데, 막상 집에 도착하면 번번이 아무 향도 나지 않아 쓰레기통에 버렸던 기억이 있다.  


3.

어느 날, 금목서 취해 아예 나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중에 '나한테서 이 향이 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꽤 강렬해서 향수에 관심이 없던 내가 여러 포털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금목서 향수를 찾아다닐 정도였다. 너무 좋은 향이기에 시중에 똑 닮은 향수가 여럿 출시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금목서 향수에 대한 정보는 많이 없었고 있어도 실제 향과는 차이가 많아 실망했다는 리뷰가 대부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생화의 향은 인공적인 화학물질을 첨가해 만든 향수에서는 재현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금목서 향수에 대한 리뷰를 많이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이 나무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는 것. 그 이유를 찾아보니 따뜻한 곳에서만 서식하는 금목서의 특성상, 한반도 남쪽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다. 어쩐지 서울에 살 때는 금목서 향에 취해 킁킁거리던 추억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진한 초록색 잎들 사이에 주황색 꽃이 흩뿌려진 금목서를 보며 학교를 다녔던 내가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는 것을 뜻밖의 사실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4.

금목서 향수를 찾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꼭 이런 체취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열심히 찾아본 결과 몇 개의 후보를 추릴 수 있었다. 향수 카페로 유명한 다음의 <향수 사랑>에 가입하여 사람들이 올린 리뷰를 찾아봤더니 가장 가까운 것으로 무사시노 워크스의 '금계'가 있었다. 향수 문외한이었던 내게는 낯선 브랜드여서 찾아봤더니 아직 한국에도 론칭되어있지 않은 일본의 향수 전문 기업이었다. 구입 방법은 이만 원에 달하는 배송비를 내야 하는 직구뿐이었다. 용량은 ml인데 벌써 배송비만 이만 원이라니! 도대체 어떤 향일까? 정말 쌀쌀한 바람에 뭉게뭉게 풍겨 나오는 금목서 향을 내는 걸까? 어떤 사람은 파마약 냄새라는데, 정말 그러면 어쩌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싼 가격에 선뜻 구매는 하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다가 용기 내어 시향 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향수 사랑 카페에서는 자신이 가진 향수를 소량으로 나눔 하여 시향 하고 싶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선한 문화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멋진 것 같다. 흔치 않은 향수 종류라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떤 천사 같은 분의 나눔으로 나는 조그마한 공병에 담긴 이 향수를 시향 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직도 떠올리면 웃음이 새어 나오는 기억이다. 자취방에 향수를 소심하게 칙칙, 조금씩 뿌리고 난 뒤 친한 동기들을 전부 불러 내 실제 금목서와 가까운지 이야기해달라고 한 것이다. 며칠 전부터 이 금목서 향수에 대해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다닌 터라 친구들도 꽤나 궁금해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는 확실히 생화랑은 다르다고 이야기했고, 어떤 친구는 꽤나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이 정도로 흉내 낸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그 계절이 아니면 절대 맡을 수 없는 금목서 향을 이제 봄에도 여름에도 맡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5.

그 뒤로 중요한 일이 있거나, 오랜만에 향기를 뽐내고 싶을 때 이 향수를 애용했다. 어느새 금목서 향수는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나를 이 향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친한 동생은 이미 강의실에 들어서면 언니가 와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진하게 뿌리지 않아도 잔향이 오래가는 향수였다. 어떤 날은 창문 옆에 있는 싱크대에서 양치를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선생님이 들어와 '어딘가에 금목서가 피었나 보네' 중얼거리시는 걸 들으며 가만히 웃기도 했다. 또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다가 옆에 있던 할머니가 향이 참 좋다고 말을 건네셔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기억도 있다. 향기로 기억된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좋은지, 향수를 뿌리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기쁨이었다.


6.

즐겨 쓰던 금목서 향수를 다 쓰고 나서 막상 재구매하려니 그새 환율로 인해 가격이 또 올라있었다. 이걸 어쩌나, 여유자금도 없는 데 또 사는 건 욕심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사지 못했다. 하지만 향수를 한 번 써보니 보이지 않은 특별한 옷을 입고 외출하는 기분이 금세 그리워졌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금목서 향을 재현해내리라!' 다짐하고 수제 향수를 만드는 곳에 찾아간 적이 있다. 물론 나올 때는 쑥 향이 나는 전혀 딴 판인 향을 들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 날로 금목서 향을 내가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날, 꽤 정성스럽게 만든 수제 향수로 만족하자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지만 아직까지 절반도 쓰지 못한 것 보면 역시 금목서 향을 대체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바람이 매서워지고 금목서가 져버린 계절이 못내 아쉬워 글까지 쓰고 있는 것이겠지.


7.

겨울에 어울릴만한 향을 찾고 있다면, 단연 무사시노 워크스의 금계 향수를 추천하고 싶다.

차가운 바람과 참 잘 어울리는 깊고 따뜻한 향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뿌리면 너무 진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밖에 나가 바람에 조금, 스치는 사람들에게 조금, 흘려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내 곁에는 은은한 잔향만이 감도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향수를 쓰지 않았던 내게 새로운 기쁨을 찾아준 금목서와 무사시노 워크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7일간의 매일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