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줄곧 일찍 일어난다. 조만간 세 명의 교수에게 내 논문 프로젝트와 작가적 관점을 설명해야 해서 곤두서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두두두 다다다. 원격 근무를 위해 일찍 일어나는 수아를 따라 덩달아 일어나는 것이 적지 않다. 두구두구 다다다닥. 닥닥 다다다닥. 두두두두두 다다다 다닥 투두둑 탁닥. 맥북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에는 디귿이 많다. 디귿은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그렇지만 오늘쯤 되니까 이 소리가 듣기 싫었다. 더 자고 싶다. 두두두두 다닥닥. 조용하게 있고 싶다. 두닥두닥두 다다다 다탁닥. 부드럽게, 하지만 미친 듯이 귀를 난타해대는 타자 소리에 나는 이내 몸을 일으켜 수아에게 인사를 했다.
수아는 잠옷 차림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나도 자세를 고쳐 앉아 그의 옆에서 하릴없이 나도 브런치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그날 쓴다는 게 전제였는데, 이미 대단한 속도로 밀리고 있다.) 바알간 해가 지평선 위로 눈부신 햇빛을 한껏 끌어올릴 때쯤,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준비했다. 오늘은 조각낸 검은 빵을 크루통처럼 튀기고 샐러드 위에 얹어보았다. 중고 가게에서 사 온 양철 팬은 기름을 심하게 빨아들였고 나는 그 위에서 조각 빵들을 아무렇게나 뒤집었다.
할 일이 많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쁜가. 논문 글쓰기는 사실 시작도 못했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일에 손을 쓴다. 먼저,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내 논문은 서울과 바이마르 두 도시가 어떻게 자기 과거를 지워내면서 혹은 박제하면서 오늘을 구성하는지 비교하는 것이라 두 도시에서 각각 퍼포먼스 작업을 하나씩 진행한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 I, C, D가 서울 청계천-을지로 공구거리 골목에서 진행한 내 퍼포먼스 영상을 본인들이 참여하는 전시에 선보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나야 작품 영상만 전달해주면 되는 상황인데, 그것조차 버겁다는 게 함정. 이미 스스로의 마감기한은 한참 넘겨버렸고, 대충 내일까지는 편집을 마쳐야만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다음 주 바이로이트에서 진행될 기후 숲 나무 심기 액션에 참여하기 위해 차편과 숙소를 정하는 일이다. 남자 친구 K는 이 일의 총책임자로서 팀원, 파트너들과 소통하며 행사 준비를 마무리 짓느라 굉장히 바쁘다. 나도 이 일에 디자이너로 참여하고 있는데, 내가 주로 관여하던 홍보 업무는 진즉에 끝났다. 내게 남은 할 일은 바이마르에서 바이로이트로 나무를 심으러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친구들 - 수아와 아샤 - 을 안전히 데리고 가기 위해 차편과 숙소를 알아보는 것이다.
간단하지만은 않다. 주머니 사정 빡빡하고 차도 연고자도 없는 유학생 입장에서는 카풀(블라 블라카)과 또 다른 유학생만이 재산이다. 물론 내가 원할 때 그것들이 항시 대기한다는 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변수고, 아니나 다를까 다음 주 행사 시작 전에 제때 도착할 차편과 숙소가 아직 안 보여 계속 알아보느라 시간이 들고 있다. 결국 행사가 개최되는 바이로이트는 내가 아닌 K의 나와바리이기에, 상당 부분 K에게 손을 빌게 되었다. 짐을 줄여주질 못했다.
하는 일 절반 이상이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다. 영어로 고르고 골라 쓴 말들을 번역기를 돌려 독어로 다시 작성해서 메시지와 메일을 보내는 등의 일은 뭔가 하루 시간표 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엄청 잡아먹는데 돌아서면 '나 오늘 대체 뭐했지?' 싶다. 동터오는 걸 본 게 겨우 몇 시간 전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해는 다시 지평선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별 것 아니어야 했을 일들이 원하는 속도로 진척되지 않는 날이 자꾸만 이어지니 조바심을 넘어 짜증이 났다. 애초에 모든 것을 더 여유 있게 계획을 했어야 했나? 계획을 이렇게 못하다니 내가 미숙한 탓인가? 이럴 때가 아닌데 나는 너무 놀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4월에 수아를 오게 한 나의 계획이 한심스럽고, 총체적 스트레스에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했다.
오늘 바이마르 인근 옛 강제수용소 '부헨발트'에 홀로 다녀온 수아가 밖에서 외식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사실 누구든 부헨발트에 혼자 가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다녀오면 뭐라 말하기 힘든 끔찍한 기분이 들고, 이 작고 귀여운 바이마르가 다시는 이전처럼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어수룩한 미팅이 두어 개 잡혀 있어서 기어이 수아를 혼자 보냈다. 국물이 당기는 차가운 날씨였다. 이미 생각이 많아질 대로 많아진 뒤라 나는 외식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일단 막트플랏츠 모퉁이에 쌀국수 가게가 하나 있다고 소개했다. 학과 친구들 몇몇이 거기 베지 버거 맛있다며 먹어봤냐며 물어봤던 그 가게다. 아니 못 가봤어. 기분 내러 외식하기에 내겐 비싼 음식이었다. 아니 기분 내고 싶은, 폭삭 잡쳐져 있는 날이 너무 많은 탓인가. 수아를 만나 가게를 향했다. 저녁시간이라 사람들이 꽤 많이 앉아 있었다. 하필 남은 자리가 길가 쓰레기통에 가까운 테이블이었다.
쌀국수와 맥주를 시켰다. 무거운 얼굴을 그대로 들고 온 나의 맞은편에 수아가 앉아 있었다. 괜히 삐뚜루 해진 마음을 숨길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대화를 하고 나온 국수를 먹었다. 우리가 쓰레기통 옆에 앉아 있고, 팁을 얹어 현금으로 식사를 계산할 타이밍이 가까워지고 있고, 내일 나는 즉흥환상곡처럼 이어지는 타자 소리에 일어나겠지, 따위의 별 것 아닐 일들이 모두 다 신경 쓰였다. 맥주며 쌀국수며 다 맛있었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오늘 저녁 내가 낼게.
정 고마우면, 남은 날동안 저 좀 더 잘 챙겨주세요?
국수가 다 비워지자,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작은 친구가 장난기 어린 말을 건넸다. 내 머릿속, 얼굴 위로 성의 없게 드러나 있는 생각들을 그는 쉽게 다 읽었을 것이다. 이 저녁식사 내내 내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앉아있었는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쩌면 이 식사 이전부터 줄곧,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는 날 수아는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아는 수아라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거기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어도 내게 부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주 아차 싶었다. 대단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 친구가 이 저녁을 함께하러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를 기억해냈다. 파리나 코펜하겐, 암스테르담, 런던이 아닌 하필 바이마르에, 근사한 유럽식 레스토랑이 아닌 고작 쌀국수집에서, 한화가 아닌 외국 화폐로 국수 두 그릇을 계산하는 수아의 두 손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러 오기 위해 두닥이는 키보드 소리로 매일 하루의 시간을 지불하고 있다. 두다닥, 두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