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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oda Oct 24. 2024

조, 바심

곡식을 타작하거나 잡초에게 개수작당하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아이들이 엄마의 외출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어린 나의 이유는 내 맘대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골라준 옷보다 더 잘 입겠다는 욕심으로 옷장과 서랍을 죄다 열고 신중하게 옷을 골랐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데, 코디를 마친 후 기대감을 안고 본 거울 속에는 긴소매 티셔츠 위에 반소매 티셔츠, 그 위에 또 민소매를 입고 스타킹 위에 반바지를 입은 레이어드 끝판왕이 있었다.


그만둔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첫 직장은 짜릿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그때 알았다. 커다란 건물 안팎에 주렁주렁 달린 내가 디자인한 사인물과 인쇄물을 볼 때면 풍년을 맞은 농부가 된 성싶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내가 일군 내 세상이었다.


그러나 곧 땅이 부족해졌다. 주렁주렁 달린 농작물을 뒤로하고 새롭게 더 넓은 땅을 찾아 떠났다. 첫 땅에서 농작물을 이것저것 결실한 경험이 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동료 농부들의 응원도 성공예감에 확신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땅을 찾는 일은 순탄하지 않았다. 땅을 보느라 조바심의 씨앗이 어디선가 날아와 마음 한편에 움트는 것도 몰랐다. 땅이 문제인가, 농작물이 문제인가. 저 멀리 떨어진 땅에도 가보고 잘 모르는 농작물도 새로 배워 심어봤다. 이상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수확이 없다.


겨우 허리를 펴보니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농부는 어딘가 이상한 자신의 차림새를 발견했다. 이 밭, 저 밭 돌아다니며 장만한 옷가지를 여름옷, 겨울 가리지 않고 뒤죽박죽 껴입었다. 이 농작물, 저 농작물에 쓰였던 농기구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양손 가득 짊어지고 있다. 이제는 어떤 땅을 일구고 싶은지, 어떤 농작물을 키우고 싶은지 희미하다. 이 농작물의 전문가도 아니고 저 농작물의 전문가도 아니다. 이 땅에서 햇수를 채운 것도 아니고 저 땅에서 햇수를 채운 것도 아니다. 심지어 흉년에 허덕이는 동안 다른 농부들은 시기에 맞는 수확을 마쳤다. 동료 농부라 불리기도 민망한 형편이 되었다. 불쑥불쑥 조바심이 본격적으로 잡초처럼 돋아난다.


조바심은 조를 바심, 타작한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는 꼬투리가 질기기 때문에 애를 써서 타작한다. 그래야 간신히 좁쌀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노력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마음을 졸인다는 풀이가 나에게 기가 막히게 적용된다. 그런데 사실 조는 잡초인 강아지풀을 작물화한 곡식이다. 조와 강아지풀은 서로 교배도 가능하고 유전체 검사로도 원종이란다. 치열했던 지난날의 사투는 조바심의 산물이었는데, 이 조바심은 어쩌면 조의 타작이 아니라 강아지풀의 수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는 자신을 열심히 비벼대는 간지러움을 즐기며 낄낄거렸을 강아지풀을 생각하니 약이 잔뜩 오른다.


잡초의 개수작으로 대흉년을 맞은 농부에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좋겠다. 햇살도 따스하게 내려앉아주면 더욱 좋겠다. 두더지가 와서 친구 하자고 하기 전에 땅에서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 찬란한 계절을 만끽하면 좋겠다. 땀에 절어버린 여름옷도, 겨울 옷도 빨래통에 벗어던지고 이 계절에 맞는 근사한 옷을 꺼내 입으면 좋겠다. 다만 레이어드 끝판왕의 재등장은 삼가자. 당장 쓰지도 않을 농기구들은 두 손에서 와르르 털어내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으면 좋겠다. 곡식과 잡초 사이의 그 어딘가에 있는 우리네 인생은 그냥 이렇게 사는 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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