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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oda Oct 21. 2024

좋은 언니 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나는 전쟁 중이다.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4살 무렵 발발한 모녀대전은 34살이 된 지금까지 끝나지 않았다. 장기전에 들어가니 대충 흐름이 보인다. 보통은 나의 일방적인 지랄과 엄마의 일방적인 사과가 반복된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져버린 새우는 바로 동생이었다.


자본주의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나이가 되었다. 지랄 맞은 고래와 등 터진 새우는 각자 삶의 터전으로 독립을 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다. 물리적 거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래 싸움의 주기도 길어졌다. 이제야 등 터진 새우의 앓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부채감과 보상을 나는 당연하게 전리품으로 누렸다. 하지만 등 터진 새우에게 전리품은 없었다. 새우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전쟁 피해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한창 타인의 시선에 예민할 사춘기 아이에게 3년 전 언니가 입던 교복은 가히 사극 소품이었을 것이고 먼저 대학생이 된 언니의 화장품은 감히 손도 대지 못할 언니만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SNS에서 본 90%의 확률로 자매 중 동생이 더 키가 크다는 게시글이 떠오른다. 내가 동생보다 키가 큰 것이 동생 몫까지 홀로 다 누린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터진 등을 끌어안고 훌쩍 자라 내 눈 아래 오는 동그란 머리통만 그저 쓰다듬는다.


다행히도 등 터진 새우는 지랄 맞은 고래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릴 때 사진에서나 지금이나 항상 내 옆에 딱 붙어있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 데다가 사고방식과 취향도 똑 닮아 버려서 성인이 되어서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떤 때는 동시에 똑같은 말을 내뱉기도 하고 눈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정말로 뉴런을 공유하는 건 아닌지 신기할 정도다. 이 동그란 머리통이 눈가에 걸리지 않는 날엔 더디 가는 시간이 따분하기 짝이 없다.


고래도 살고 새우도 사는 바다 같은 마음으로 다 받아주고 싶다. 뒤늦게 막내 꼬장 부리는 것도 기특하고 언니 놀리는 맛에 까불까불 덤비는 것도 귀엽다. 아마 31살 중에 제일 귀여울지도. 모녀대전의 후유증으로 좋은 언니 병이 생겨서 지출이 커다랗지만 아무래도 좋다. 난 얘랑 같이 노는 게 제일 재밌으니까 갖고 싶어 하는 거 다 사주고 평생 같이 놀고 싶다.


지금도 가끔 발발하는 모녀대전에 터진 등이 또 터질 때도 있는데 이제는 얘도 한 성깔 해서 괜찮다. 할 말 다 하는 까칠한 블랙타이거 새우로 성장했다. 가족들 아무도 함부로 얠 못 건든다. 그래도 인정머리가 있어서 누군가 도움을 구하면 외면하지 않고, 양보와 헌신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선다. 자신을 지킬 줄도 알고 실속도 잘 챙긴다. 사리에 밝아 야무지고 꼼꼼하다. 성실해서 이미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고 책임감도 강하다. 눈치 백 단에 손도 빠르다. 쪼끄만 게 운전도 잘하고 언니가 호구 잡히지 않게 지켜주려고 한다. 무엇보다 나를 좋아한다. 엄마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언니가 만지면 얌전히 있는 게 아주 엄마 앞에 서 언니를 의기양양하게 한다.


이쯤 되면 내가 더 좋아하는 거 같지만 그래도 뭐, 난 좋은 언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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