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지는 바투미 해변에서
조지아 여행기
- 노을이 지는 바투미 해변에서
공항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먹구름이 꽤 끼었지만 이따금 구름 사이로 저무는 해가 모습을 드러낼 것도 같았다. 조금만 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전에도 흑해(Black Sea)에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이스탄불에서 한 번, 그것도 꽤 오래전 일이었다. 물론 바다의 모습 만으로 명칭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구글이 여기는 흑해라고 하니 그렇구나 하고, 그 이름을 잠깐 떠올린 뒤 노을이 지는 모습을 감상하면 그만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바다로 붉은빛이 내리면 어둠이 오기까지 모든 것을 잊게 되는 조지아의 휴양 도시, 바투미(Batumi)에 도착했다.
바투미에 도착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금요일 저녁에 퇴근한 후 심야버스를 타고 부산에서 인천으로 향했다. 새벽에 도착한 공항에서 정오가 가까워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비행기로 열세 시간쯤 이동했다. 한국에서 조지아까지 가는 직항 항공편이 없어 알마티에서 경유하는 과정도 있었다. 그렇게 바투미에 도착해 해변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현지 시간 저녁 여덟 시, 시차를 고려하면 내게는 새벽 한 시인 시각이었다.
하루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 심지어 카페인도 공급되지 않은 하루였다 - 에서 맞이한 밤이었다. 머리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했고 침대에 눕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투미에서 주어진 시간은 하루였고, 시차적응을 단번에 끝내기 위해서라도 몇 시간은 버티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창 밖에는 바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몹시 피곤했지만 그게 숙소에 있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바다 옆으로 이어진 해양공원을 따라, 바투미에 오면 꼭 보고 싶었던 ‘알리와 니노 동상’을 찾아가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 바로 앞에 자갈 해변이 있었다. 여름의 조지아는 한국보다 낮이 길어서, 저녁 여덟 시가 되니 그제야 해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춰 구름이 조금씩 걷힌 덕분에 바다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노을의 주황빛, 구름이 물든 핑크빛, 그리고 바다의 푸른빛이 한 데 어우러져 아주 볼만한 풍경이었다. 내가 이번 조지아 여행에서 바투미에서 노을을 볼 수 있는 날이 지금 이 순간뿐임을 생각하면,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는 경치였다.
쿠르반 사이드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소설 <알리와 니노>를 워낙 재밌게 읽은 터라, 알리와 니노 동상을 제일 먼저 보러 갈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해안가로 나오니 흑해로 노을이 지는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원래의 목적지는 잠시 잊어버리기로 하고 맥주를 파는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해변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어둠이 깔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 참 좋겠다 싶었다.
바투미 해변 뒤의 산책로에, 한국으로 치면 좀 세련된 포장마차쯤 되는 가게가 있었다. 음악을 크게 틀고 다양한 술을 팔고 있었는데, 물론 캔맥주도 있었으며 아래 가격을 뜻하는 숫자 7이 적혀있었다. 1라리(조지아의 화폐단위)에 약 500원 정도이니 3,500원 정도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방금 막 조지아에 도착했기에 현지 화폐를 보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 가진 작은 단위의 현금은 5라리 지폐와 10, 20 등의 숫자가 적힌 수많은 동전들이 전부였다.
'5라리가 지폐인데 20이 적힌 동전은 뭘까?'
0.2라리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내게 숫자 '1'이나 '2'가 적힌 동전은 없었기에 1라리가 동전으로는 10으로 표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듯했다.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고 있는, 긴 장발에 히피펌 같은 스타일을 한 DJ 겸 가게 주인에게 5라리 지폐와 동전 한 뭉터기를 보여주며 7라리를 계산해 달라고 애매한 몸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춤을 추던 남자는 나를 잠깐 보더니 5라리 지폐와 20과 10이 적힌 동전을 대충 서너 개쯤 집어 들고 오케이라며 맥주를 가져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7라리가 될 것 같은 조합은 아니어서 바가지를 쓴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맥주를 가지고 다시 자갈이 깔린 해변으로 갔다. 그때는 낯선 곳이라는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던 시간이었고, 처음 보는 동전은 어렵기만 했고, 수면 부족으로 머리는 멍했고, 또 황혼녘의 풍경은 황홀해서 얼마쯤 손해를 봤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20이 적힌 동전은 실제로 0.2라리였고 1라리 2라리 동전은 따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저녁 장사를 하던 뽀글 머리 남자가 정신 못 차리던 새벽 한 시의 여행자에게 맥주 가격을 깎아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였다.
조지아어가 적혀 있으니 현지 맥주겠거니 싶어 고른 음료가 일주일쯤 시간이 흘러 실컷 마시게 될 '카즈베기 오리지널'이라는 것 - 조지아어는 조금도 읽을 수가 없어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 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에 맥주의 이름을 따지는 일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부서지는 파도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 자갈을 흩뜨려 맥주 캔을 두고 자리를 만들어 그대로 앉았다. 낯선 도시, 멍한 기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 바다의 풍경, 하늘의 색이 변해가는 시간,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담아가고 싶은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풍경을 앞에 두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이 스치는 감촉까지.
그런 점도 여행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일까. 어떤 아름다운 현재라도 그대로 미래로 가져갈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도 결국에는 과거에 놓아두어야 한다. 지나간 모든 시간은 불완전한 기억이라는 그릇에 담아야 하고, 불완전하게 재생하며 추억하는 방법 만이 유일하게 허락된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머무르는 존재니까. 바투미 해변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카메라를 끄고 렌즈캡을 닫았다. 그리고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 캔을 들었다. 어제나 내일이 아닌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조금 더 집중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