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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칸나의 그림책방 Jul 23. 2015

그림 읽기 : 국민화가 박수근

 

그림, 어떻게 읽을까?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꽁꽁 숨은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 비밀 같은 암호를 풀어 자신의 마음으로 해석해 내는 것. 이러한 암호를 풀어내고 작품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차가운 그림은 뜨거운 감동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겠죠.


'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가' 에 대한 명확한 답을 던져주는 친절한 그림은 얼마 없습니다. 감상자가 스스로가  찾아가야 하는 즐거움이기에,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때때로 어렵게 다가옵니다.


학문적으로 그림을 해석하는 데에는 수 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한명의 감상자로서 저는 늘 작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 DDP에서 열렸던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보고 한 동안 그 감동에서 헤아려 나오지 못했습니다. 투박한 선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 담담한 색이 전해주는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공유하고자 박수근의 그림을 소개합니다.  




예술가 박수근의 삶, 그 절실함에 대하여


박수근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박수근은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겪으며 매우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보통 학교 시절 박수근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힘든 형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합니다.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박수근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독학으로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18세가 되던 1932년, 박수근은 '조선 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조선 미술전람회란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미술 공모전으로, 이곳에서 입선하는 것은 곧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큰 기회였습니다. 미술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박수근이 유학생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입선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성과였지요. 이렇게 박수근은 화가로서의 큰 가능성을 내비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배고픈 시절, 가난한 화가였던 박수근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가 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아내 김복순여사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김복순 여사에게 한눈에 반한 청년 박수근은 적극적인 구애를 펼칩니다. 그러나 부유한 집안이의 딸이었던 김복순 여사와의 결혼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박수근이 몸 져 눕는 상황이 벌어지기 까지 합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둘은 어렵게 결혼에 골인합니다.  김복순여사를 향한 박수근의 절절한 마음은 그의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

박수근, 빨래터 , 1954

한국전쟁, 그리고 흩어진 가족


결혼 이후 박수근은 도청 직원으로 일하며, 안정적으로 화가 생활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여러 차례 조선 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어여쁜 자식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립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은 다가왔고, 한반도에도 전쟁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박수근 가족이 머물던 평양에는 미군의 폭격이 이어졌고, 기독교인이었던 박수근은 공산 체제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한국 전쟁 발발과 유엔군의 후퇴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박수근은 가족과 헤어져 먼저 이남 하게 되고, 화목했던 가족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립니다. 


김복순 여사는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목숨을 건 월남을 강행합니다.  가족은 그렇게 흩어져 연락 한 통 하지 못한 채 2년이란 시간을 보냅니다. 이후 김복순여사의 처남이 살고 있던 서울 창신동에서 박수근은 극적으로 가족들과 재회하게 됩니다.  

박수근, 장남 박성남, 1952

생이별의 시간 동안 부두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던 박수근은 꿈같은 재회 이후, 가장 먼저 다섯 살 난 아들의 초상을 그립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있다면 혹시나 다치지는 않았을지. 전화도 편지도  주고받을 수 없는 전쟁통에 가족을 잃어버린 박수근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버지로서, 또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박수근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던 가족과 재회했을 때, 그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2년 만에 훌쩍 자라 버린 어린 아들을 앉혀놓고, 박수근은 또 다시 붓을 꺼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이 버거웠던 다섯 살 아들은 꼼지락대며 아버지의 모델이 됩니다. 아마도 박수근은 아들을 그리며 이렇게 잘 버텨준 가족에게, 그리고 그가 믿는 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 것입니다. 


 예술가의 초상 : 박완서의 나목 


가족과 재회한 박수근은 서울 창신동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는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가로 취직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 나갑니다. 당시 초상화부 직원으로 일하던 박완서 작가는 이후 소설 [나목]으로 자신의 추억이 담긴 6.25 당시의 미군부대 P X와 작가 박수근을 멋지게 그려 해냅니다. 박완서 작가가 '나목'이라는 작품으로 문학계에 등단하게 되었으니, 둘의 인연은 꽤나 깊고도 신기하지요.  


 ▲ 미군 PX부대 초상화부 모습                                                               ▶ 젊은 시절의 박완서 작가 


박완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그 분(박수근 화백)을 만나고 P  X생활이 훨씬 즐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박완서 씨의 소설은 실제 박수근 화가와 그의 그림들을 모델로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목]의 주인공 '경아'는 박완서 작가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의 기억이 반영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경아가 화가 옥희도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예술가가 가지는 '고독한 에너지' 때문인데요, 아마도 박완서 작가는 박수근 화백에게서 그러한 힘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목]을 통해 화가 박수근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볼 수 있습니다. 전쟁 속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무게.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끈을 놓지 않는 열정 등을 말이지요. 

"나 며칠만 좀 쉬어야겠어. 며칠이면 될 거야. 알겠지?"
"왜요? 안 돼요."
나는 다급하게 가로막았다.
"그래야겠어."
그는 한결 단호해지더니,
"내가 아직도 화가인지 알고 싶어."
"네? 뭐라고요?"
"난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렸어. 너무 오랫동안... 아직도 내가 화가인지 궁금할 만큼 오랫동안.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니란 것 보다 화가가 아닌 것이 더 두려워. 화가가 아닌 난 무엇일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어. 며칠 동안만 내가 화가일 수 있게 해줘."
"그렇게 화가이고 싶으세요?"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어. 미치도록 그리고 싶어. 정진과 몰두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회색빛 도시, 인간의 선함을 그리다


박수근은  P 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작은 판잣집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작업실이자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그곳에서 전업 화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젤을 놓을 자리가 없어 벽을 이젤 삼아 그림을 그릴만큼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박수근은 창신동 자택에서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다져나갑니다. 


그러나 전업 화가로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직후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림을 살 사람은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박수근은 반도호텔에 위치한 화랑에서 그림을 팔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당시 반도호텔에 머문 많은 외국인 방문객은 한국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품을 원했고, 덕분에 박수근은 한 달에  한두 점 그림을 팔아 작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박수근은 회색빛으로 물든 도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고,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해져야만 하는 여성들.  어머니는 갖은 물건을 내다 팔고, 어린 누이는 그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전쟁과도 같은 삶을 말이지요.


  

◀귀로, 1964           ▲ 앉아있는 여인, 1963        ▶아기업은 소녀, 1953




박수근은 1965년,  51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 생전에 큰 명예와 부를 누리지 못했던 박수근은  작가로서의 기량을 한창 피워낼 나이에 병마와 싸우게 됩니다. 그는 백내장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비가 부족해 뒤늦게 수술을 하게 되었고,  결국 한쪽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한쪽의 눈으로, 그는 또 다시 붓을 잡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 1964 : 박수근 화백이 한쪽시력을 잃고 그린 그림

어떤 예술이 진짜 예술일까? 


박수근 화백은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작가라고 평가받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수백 가지의 대답이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박수근의 그림이 한국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겠지요.


저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련한 감정이 휘몰아칩니다. 우둘투둘한 질감과 투박한 선, 그리고 무채색의 그림은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 그럼에도 삶은 끝없이 이어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힘으로 또 다시 그 전쟁 같은 삶을 살아내야 했겠지요.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상처를 애써 무디게 만들고 살아냈겠지요.


 박수근은 그러한 아픔을. 그 아픔을 가진 우리의 이웃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느낀 화가였기에.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일까요? 그리고 어떤 예술가를 훌륭한 예술가라 말할  수 있을까요? 


값이 비싼 그림보다, 크고 화려한 그림보다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생각해봅니다. 바쁜 일상을 잠깐 멈추고 마음이 먹먹해지는 감동이 있는 그림.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지만, 그 시대를 그리워할 수 있는 그림이라면 분명 좋은 그림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                                               


 -  박수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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