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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칸나의 그림책방 Aug 01. 2015

그림 읽기 : 민족화가 이쾌대

전시회 산책 : 덕수궁 미술관


전시회 산책 : 덕수궁 미술관

장대비가 내리던 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덕수궁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장식한 포스터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중절모를 쓰고 멋지게 웃고 있는 모던보이. 바로 화가  이쾌대입니다.  지금 덕수궁 미술관에는 이쾌대의 전시가 한창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민족화가라 불리는 이쾌대의 전시를 선보였는데요. 이번 전시는 1930년에서 50년 무렵까지 약 20여 년에 걸친 이쾌대의 대표적인 작품들과, 편지나 드로잉 연습 같은 그의 개인적인 기록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시대를 살아낸 화가 이쾌대. 전시를 보기 앞서 그의 삶을 되짚어보며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그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화가 이쾌대 , 그의 생애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명한 만석꾼의 막내아들로 굉장히 부유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자택의 면적만 수천 평 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그는 휘문고통학 재학 중 서양화가 장발을 담임교사로 만나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이쾌대는 학생 시절  '조선 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졸업 후 일본 유학을 계기로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쾌대는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졸업 후 일본의 미술전람회에 연달아 두 번이나 입선을 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그는, 촉망받는 화가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1941년 귀국한 이쾌대는 작품 활동과 동시에, 다른 화가들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며 진보적인 미술가로 자리 습니다. 광복 이후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성북동회화연구소'를 설립해 학생들을 지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이쾌대는 인민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이후 포로교환에 북한을 선택하여 월북하게 됩니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 당대 미술계의  역할 담당하던 '이쾌대'는 월북 이후 남한에서 완전히 흔적을 감추게 됩니다.


비교적 최근까지 강력한 반공주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이쾌대'라는 이름은 절대적으로  금기시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월북화가들의 작품들이 해금 조치되기 시작했으니,  이쾌대라는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여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이쾌대는 대중에게 아직은 생소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이쾌대는 월북 이후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전미술'을 벗어나는 활동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월북 이후 이쾌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1965년 위천공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80년대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북한의 '주체미술'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뮤즈가 된 여인, 유갑봉


2인 초상, 1930년대

휘문보고 재학 시절, 이쾌대는 한 아름다운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청년 이쾌대의 마음을 빼앗아간 주인공은 바로 진명여고에 재학 중이던 여고생 유갑봉 였는데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이쾌대는 절절한 러브레터로 유갑봉 여사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하고, 둘은 결혼과 동시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오!
어여쁜 아가씨여  오! 나의 귀여운 천사여!
나는 지금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여 오직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무아몽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귀동녀여!
당신은 왜 이다지 나의 마음을 끕니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솟아나며 하늘나라 어린이 드리 우리 두 사람 머리 위에서 날면서 행복의 씨를 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오! 나의 사랑 내 사랑. 참된 나의 사랑!
한 떨기 장미꽃. 나는 그 옆으로 배회하는 벌 나비올시다. 장미꽃과 벌 나비는 이미 예약된 사이였고 그 두 사리에는 아리따운 사랑이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었더랍니다.

- 이쾌대의 러브레터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쾌대는 일본 유학시절 아내를 모델로 수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갑봉 씨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 같은 존재였지요. 이쾌대는 아내 유갑봉의 초상에서부터 점차 조선의 인상으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갑니다.  


그는 특히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의 조화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유학생이었던 이쾌대는 조선인만의 전통,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서양화적인 기법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도를 통해 점차 발전된 작품들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무희의 휴식, 1937      ▷상황, 1938




△카드 놀이하는 부, 1930년대     ▷ 봄처, 1940년대 말


이들은   해방 맞이했,  생활속에서 이쾌대는 활발한 작품활 이어갑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 , 한반도는  다시 전쟁이라는  란을 맞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막  발발했을 때, 유갑봉 여사는 만삭의 몸이었고 이들은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쾌대가 북한군 포로로 잡혀가게 되면서 둘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립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그는 조각과 그림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는데요, 포로의 신분으로 유갑봉 여사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 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쾌대는 포로선택에서 북한을 택합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그는 왜 북한을 선택했을까요? 그의 월북에 관하여 정확하게 밝혀진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많은 추측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1948년 초 이미 월북해 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형 이여성의 영향이었는지,  이미 '빨갱이'로 낙인 된 이상 남한에서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렇게 가족과 그림들을 남겨둔 채 월북합니다.


이후, 남한에 남겨진 가족들은 월북작가의 가족이라는 감시를 받으며 힘든 삶을 이어갔습니다.  집 주위에는 늘 사복경찰이 맴돌았고,  유갑봉 여사는 수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습니다.  이러한 감시 속에서도 유갑봉여사는 남편의 그림을 다락방에 꽁꽁 숨겨둡니다.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절대로 버리지 못했던 남편의 작품들.  아마도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만큼 더욱 강한 여인이 되어, 강한 어머니가 되어 그 힘든 시기를 버텼겠지요.


유갑봉 여사는 작은 메모부터 대작들까지 남편의 흔적들을 정성스레 모아 둡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월북화가 해금을 보지 못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1980년에 한 많은 생을 하게 됩니다. 이후 월북화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시행되었고, 그렇게 꽁꽁 숨겨져 있던 이쾌대의 작품들은 새로운 시대에서 새롭게 조명됩니다.


민족화가 이쾌대


이쾌대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강한 화가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1930년대 그렸던 많은 그림에서 그가 한국적인 색을 찾기 위해 , 그리고 한국적인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대의 이쾌대가 한복을 입은 여인들을 통해 민족의식을  표현했다면,   30대의 그는 더욱 깊은 내용과 형식으로 그의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발전시켜갑니다.  

군상Ⅰ: 해방고지 , 1948
군상Ⅳ , 1948추정

총 네 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군상 시리즈는 모두 2미터가 넘는 크기로,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그려진 작품으로는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상 시리즈는 이쾌대의 작품이 재조명되면서 가장 먼저 주목받았고, 따라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에게 민족화가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었습니다.


월북화가 혹은  민족화가라는 수식어로 설명되는 이쾌대.  군상 시리즈를 포함한 그의 그림들이 회화적으로 결코 완벽하다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거장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많은 부분이 서툴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군상 시리즈를 완성했을 때, 그는 고작 30대 중반의 젊은 작가였다는  생각해보면. 월북하지 않고   작가로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나라를  민족이 아니었다면, 사상 때문에 서로를  사회가 아니었다면 그는 어떤  그렸을까요?


무궁 무진 했던 그의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없었기에, '민족화가'라는 간단한 수식어로 그를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집니다.  많은 연구와  많은 해석  자리를 채워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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