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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1. 미국 임상병리사를 꿈꾸다.

2015년, 보수교육과 관련해 임상병리사 협회 홈페이지를 둘러보다 우연히 해외취업란에서 임상병리사의 미국 취업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 현재, 나는 미국의 시골마을에서 임상병리사로서 일하고 있다. 단 두줄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지만, 그 7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에 관한 나의 에피소드와 과정들을 공유해보려 한다.




일단 나에 대해 먼저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경남에 있는 4년제 임상병리학과를 졸업하였고, 부산 소재의 대학병원에 입사하였다. 동시에 잠실에 위치한 대학병원에도 합격하였지만, 집이 부산이라 부산을 선택하게 되었다.

2010년, 야간근무로 검사실에 첫발을 내딛었고, 상여금까지 해서 연봉 5천 정도를 받았다. 사회 초년생으로서는 충분한 돈을 벌었고, 임상병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느꼈다.

2015년, 5년 차 임상병리사, 어느새 병원일에 대한 열정은 시들해졌고, 꼰대 같은 매니저의 능력 부족과 보수적인 병원문화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 때쯤, 협회 홈페이지에서 미국 취업에 관한 글을 읽었다. 미국에서 일하고 계신 선배님이 본인 병원에 건의하여 한국 병리사들한테도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2015년 2월, 총 30명 정도의 지원자가 모였고, 그중 최종 20명이 지원하게 되었다. 영어라고는 생존 영어밖에 못하는 나도 얼떨결에 지원하게 되었고, 엄청나게 큰 시련이 있는 줄도 모르고, LA 어디에 집을 구할지, 차는 어떻게 할지 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H1b lottery도 한 번에 통과하였다. 20명 중에 7명만이 통과하였다.


그 당시 주고받던 메일에 아직 남아있는 문서들


마지막으로 IELTS speaking 7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장벽이 남아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영어실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점수였다. 2015년 5월, 처음 IELTS라는 시험을 치르고 받은 점수는 오버롤 5.5, 스피킹 5.5 였다. 1.5만 더 올리면 된다는 생각에 희망이 부풀었지만,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그땐 상상도 못 했다. (무려 15번의 IELTS 시험을 치렀고, 4년의 시간이 걸렸다.)2015년 10월, 입국 유효기간 1년짜리 H1b승인을 받게 되었고, 2016년 10월, 목표 점수를 받지 못하였고 첫 번째 기회는 무산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시급은 $33/hr 로 계약을 하였고, 병원과 직계약을 하였기 때문에, 비자비용도 없고 수수료도 전혀 없는 계약이었다. 그 당시 지원자 중에 최종 1명만이 가게 되었고, 그분은 어느새 영주권까지 취득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준비된 자 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그렇게 첫 번째 기회가 무산된 후, 그 당시 지금까지 모아둔돈으로 미국 유학을 갈까 진지하게 고민하였지만, 1년에 5천만원 가까운 학비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고, 일과 영어 같이 병행하면서 미국 준비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결국엔 6년이란 시간이 지나 미국땅을 밟게 되었다. 혹시나 지금이라도 미국 임상병리사를 준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미국으로 대학교 진학하는 것을 추천한다. 돈은 많이 들지만, 영어와 미국 문화에 친숙해질 수 있고, 현지에서 부딪히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하고, 더 나은 선택지가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끝. (Ep02에서 계속.)


*H1b Lottery

H1b 비자는 전 세계에서 65,000명이 선발되고, 지원자는 현재 30만 명에서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년에 한번 4월에 추첨이 이뤄지고, 우리가 잘 아는 뺑뺑이(?) 돌리기를 한다. 한번 떨어지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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