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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다섯시 Oct 03. 2019

늙은 개를 보내며

한 번도 꺼지지 않던 보일러가 멈췄다.


착하게 살다 착하게 갔다.


누구에게 해코지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았으며

한 번 준 마음을 도로 가져가지 않았다.


나의 늙은 개가

나의 유일한 개가,

잠시 세상에 머물다 나에게 알려주고 간다.


착하게 살다, 착하게 가라.





"이 냄새를 맡으면 깨어날지도 몰라."


아이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으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 장난이라니, 너무하잖아. 타박하려다 관두기로 한다. 딸애 얼굴이 장난기 없이 진지하다. 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주로 경직된 상황에서 발휘되어 슬픔을 잠시 희미하게 만든다. 아이는 그런 재주가 있다. 그래서 나는 곧잘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다.


작은 양말에 개의 얼굴이 다 덮였다.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의 양말을 유독 좋아하던 개였다. 온종일 뛰어다녀 콤콤한 땀냄새가 밴 작은 양말에, 개는 코를 폭 파묻곤 했다. 양말 마법이 통하지 않자 우리는 이제 정말 개를 보내주기로 한다. 15년을 함께 했지만 마지막 인사는 너무나 짧다. 한참 신나게 보던 TV가 올림픽 중계방송에 갑자기 뚝 끊겨 다시는 방영되지 않는 것처럼. 죽음은 생경하고, 늘 그렇듯 타이밍이 좋지 않다.


한 번도 꺼지지 않던 보일러가 멈췄다. 사계절 내내 돌아가던 보일러였다. 한여름조차 끌어안고 자던 나의 작은 보일러. 늘 따뜻하고 보드라웠던 개의 배가 차갑게 식었다. 겨울밤 아랫목에 손을 넣듯,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개의 배 밑에 손을 쑥 넣고 인사를 하곤 했었다. 나는 이제 어디에 손을 두고, 누구에게 다정한 인사를 보내야 할까.


참나무 밑에 개를 묻었다. 개가 좋아하던 단호박과 말린 생선 하나, 들꽃을 함께 넣었다. 갈색 캐시미어 같은 고운 흙이 개의 몸 위에 얹어졌다. 구덩이가 메워져 옴폭한 무덤이 되었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무심하게 읽던 책을 한 장 넘기듯 개가 죽었다. 개의 죽음은 그랬다. 나도 모르게 쉬는 한숨 같은 것.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찰나 같은 것. 서러워할 시간도 없이 개가 떠나갔다.  





유독 굴곡 있는 한 해였다. 나는 정신을 바뜩 차리고 걷다가도 자주 움푹 파인 구덩이에 빠졌다. 살 궁리만큼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구덩이 구덩이 끝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을 했다. 그러다 늙은 개가 죽었다. 나는 잠시 두려웠다. 개의 죽음이 또 다른 구덩이인줄 알고 지레 겁먹었다.


늘 있던 개의 자리를 본다. 여기도 저기도 개의 자리이다. 어디선가 개의 선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늙은 개가 착하게 살다 착하게 갔다. 누구에게도 해코지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았으며, 한 번 준 마음을 도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 선한 인생의 한 자락이 오늘도 곤죽이 되어 방 한편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를 따스한 이불이 되어 덮어준다. 그 온기에,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옴폭한 슬픔에서 기어 나오기로 마음먹는다.


나의 늙은 개가

나의 유일한 개가,

잠시 세상에 머물다 나에게 알려주고 간다.


착하게 살다, 착하게 가라.

내일 당장 눈앞에 깊은 수렁이 있을지라도.



















* 그동안 <아기와 늙은 개>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늙은 개는 가족 소유의 선산에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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