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지금과 정반대편에 존재할 새로운 나를 찾아
내가 처음 '사주'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대 중반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독실한 성당 언니이었던 나는 재미삼아 '오늘의 운세' 정도를 본 적은 있어도 사주에는 정말이지 관심이 없었다.
20대 중반에 다닌 첫 직장에는 사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유독 많았다. 나의 첫 사주를 봐준 한 선배는 "흙이 많네, 고집이 세겠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집'하면 우리 집 식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할 정도로 상고집이었기에, 그런 성격이 사주에 나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후로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회사를 다닐까 말까 망설일 때마다 조금씩 사주를 보기 시작했다.
큰 산이시네요
가장 최근에 본 사주집에서는 나를 '큰 산'에 비유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큰 산. 맞는 말이다. 첫 번째 회사도 7년 다녔고, 지금 다니는 회사도 이제 만 3년을 바라보니 말이다. 몸이 축나고, 고꾸라져도 몇 번은 고꾸라질 일의 홍수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좋은 말로 하면 인내가 큰 것이고, 나쁜 말로 하자면 큰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런저런 경험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 가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충분히 주었던가.
네 고집을 어떻게 꺾어
어려서부터 '네 고집을 어떻게 꺾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부모가 자식을 애써 꺾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뻣뻣하면 부러진다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부터는 여러 차례 부러져 왔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은 이제 남들처럼, 그냥 물처럼 살아보기로 마음먹는다. 순간순간 남들 하는 대로, 남들 의견대로 살아 보기도 한다. 나쁘지만은 않다. 세상에는 내것과 네것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와 정반대에 있다고 생각되던 일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어떤 일들도, '미친 척'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한다. 내것, 네것이 좀 더 섞여들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해 보고 싶다.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나'는 어쩌면 저 너머,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