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인 딸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한다. 지방선거일에 주소지인 본가로 와서 투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딸은 작년 서울 시장 보궐 선거도 하지 않았다. 투표를 안했다는 사실을 다음날 알았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딸에게 시민의 의무 운운하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화를 내지는 않되, 건조하게 말했다. “투표조차 하지 않으면 사회를 비판할 권리를 잃는 거야.”
자취방에 묵혀 있는 겨울 빨랫감을 가지러 가준다는 명분으로 투표를 마친 후. 자취방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미끼를 던졌다. 물론 딸 아이는 26년 전 나와 비교하면 완전히 딴 세상 대학생이다. 두 편의 졸업작품 준비와, 산학협동 프로젝트와 지난 겨울에 대외활동으로 개발한 서비스를 앱으로 런칭하는 일까지 눈코 뜰 새 없다. 구 의원, 시 의원들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리 없고, 모르는 사람을 대충 찍자니 아예 투표를 하고 싶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선거 공보물을 들춰 이력과 공약을 살펴보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느라 잠 잘 시간도, 남자친구 만날 시간도 부족한 딸에게 관심도 없는 수십장의 종이를 훑어 보라고 하는 말도 공허하다.
결국 투표일 아침, 딸을 깨우기 전에 이면지 한 장을 꺼내 투표해야 할 주요 후보 목록과 그들의 약력을 적었다. 교육감, 시장, 시의원, 비례대표, 구청장, 게다가 구 의원은 정당별로 가/나 2명씩 나왔다. 가 후보들이 양당 모두 청년 후보인 것이 눈에 띄었다. 딸을 깨워, 정리해놓은 후보자를 설명하다 교육감 후보 명단에서 잠시 멈췄다.
“교육감은 서울시 초중고등학교 사업과 예산을 총괄하는 의사결정권자야. 정당은 없지만, 소위 진보, 보수로 나뉘는 경향이 있어. 진보 진영은 현재 교육감을 하고 있는 조희연으로 단일화를 했고, 보수는 단일화가 안됐어. 그쪽에는 박선영, 조영달 이런 후보들이 있어.”
’사실 엄마도 판단이 안 설 때는 그냥 정당 보고 투표해.‘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아침 9시 반 쯤 도착한 투표소는 텅 비어 있었다.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소에 들어가 교육감 후보 명단을 보자, 아차 싶었다. 정당이 없으니, 번호도 없고, 이름 순서도 랜덤이었다. 딸은 분명히 누가 누군지 헷갈릴 거 같았다.
투표를 하고 나왔다.
나 : 교육감 누구 뽑았어?
딸 : 젤 앞에 있는 사람 뽑았는데?
나 : 아, 전교조 아웃 외치는 사람인데. 이번에 왜 하필 조씨가 3명이나 되냐.
딸 : 엄마가 단일화된 후보 이름을 젤 앞에 썼잖아.
나 : 투표 용지 기재 순서는 몰랐지. 그래도 네가 현재 교육감 이름은 보면 알 줄 알았어.
딸 : (겸연쩍은 듯) 내 한 표가 무슨 힘이 있겠어.
다음 날 아침, 딸에게 교육감 투표 결과를 화면 캡쳐해서 카톡으로 보냈다.
’네가 찍은 후보 2위 했네. 네 한 표는 이렇게 힘이 크단다.’ 덧붙이면서.
핀란드 지역선거 날에는 유치원 학생들도 선거를 한다고 한다.
후보는
1번 밥빵파이,
2번 생선빵,
3번 호밀크레페,
4번 훈제빙어
아이들에게 친숙한 이 후보캐릭터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유권자인 유치원생들에게 어필한다.
“나는 깨끗한 자연을 좋아해”
“나는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싶어”
“나는 양질의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해”
유치원 선거는 민주주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핀란드 정당들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합리적인 유권자가 되기위해 어릴 때부터 선거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초중고로 갈수록 학교 자치회, 전국 단위 학생 단체 등 더욱 구체화된다. 실질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의 폭이 넓어진다.
우리는 어떠한가.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성 때문에 정치적 발언도, 정당 가입도 할 수 없다. 지난 5월 말, 사교육걱정에서는 교육감 후보 국민면접을 치렀는데, 여기에 고등학생이 면접관으로 나선 것에 대해,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표명하기까지 했다. 물론 학생이 질문할 권리조차 막는 것에 강하게 항의해 번복됐지만 말이다. 이번에 출마한 일부 교육감 후보들은 민주시민교육을 좌파 교육이라며 폐지하겠다고도 했다.
입시 준비하느라, 생기부 챙기느라 바쁜 고등학생들이 정치에까지 관심을 가지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기조차 어렵다. 관심이 있으면 찾아볼 정보야 널려 있지만, 학생들의 삶에서 정치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소거되어 있다. 서로를 혐오하며 으르렁대는 어른들의 정치가 그들 눈에 근사해 보일 것 같지도 않다.
다행히 투표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가는 차 안에서 딸은 양대 정당이 어떻게 다른지, 비슷한 점은 없는지 물었다. 주변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친구들이 있긴 한데, 어떤 이슈에는 내로남불로 말하는 거 같아서 이상하다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으니 어쩌겠는가, 앞으로 딸과 정치 토크할 기회를 수시로 갖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