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디에고 마라도나 경기장
나는 2011년 봄부터 2012년 겨울까지 2년 가까이 남미에 머물렀다.
여행을 하기도 했고, 언어를 배우기도 했고,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남미의 축구를 즐겼다. 물론 축구 하나만을 생각하고 남미로 떠났던 건 아니었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여행자 입장에서 '남미축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내가 남미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은 아르헨티나 축구였다. 마라도나, 카니쟈, 바티스투타, 크레스포, 베론, 리켈메, 아이마르, 테베스, 이과인, 아게로 그리고 메시! 아르헨티나의 축구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정말 많은 사람들이, 특히 가까운 친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라고 주의를 줬지만, 아르헨티나까지 와서 TV로 축구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내게 아르헨티나 축구장의 위험성을 강조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샤이니와 빅뱅에 빠져 있던 K-POP 팬들이었으니 축구에 관해서는 딱히 새겨듣지 않았어도 됐을 것 같다. 사실 그 친구들 역시 직접 경기장에 가서 축구를 본 적은 없었고, 가끔 TV나 신문에서 다루는 경기장 폭력사태 같은 것들만 인상에 남아 그렇게 얘기했을 테니까.
하지만 직관을 결심한 당시의 나는 친구들의 조언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혼자서 경기장을 향하진 않았다. 돈은 조금 더 들지만 안전한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비용이 정확히 생각나진 않는데, 대략 7~8만원 정도 되는 돈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의 투어 프로그램은 '왕복 교통편 + 축구경기 입장권 + 간식(맥주한 잔에 핫도그)' 정도로 구성된다. 아르헨티나의 물가를 생각하면 절대 저렴하다고 할 수 없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여행자 입장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금액이다. 싸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청난 바가지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내가 처음으로 찾은 경기장은 마라도나의 프로 데뷔 팀인 아르헨티노스 주니오르스의 홈 경기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카 주니오르스와 마라도나를 동일시하지만, 보카는 마라도나가 전성기와 선수생활의 말년을 보낸 팀이며 그의 첫 팀은 아르헨티노스 주니오르스다. 그리고 보카에서 뛴 경기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게임을 이곳에서 소화했다. 경기장의 이름 역시 그의 이름을 딴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스타디움.
꽤 낡은 경기장처럼 보이지만, 2003년에 지어진 비교적 최신식 경기장이다. 수용 인원이 약 25,000명인 중소 규모의 축구전용구장이며,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그라운드와 관중석이 가까운 경기장으로 꼽힌다. 경기장 바깥에는 마라도나(닮은 것 같지는 않지만...)의 그림도 그려져 있다. 이런 건 우리도 좀 해봤으면 좋겠다. 포항 스틸야드에 황선홍, 홍명보 두 선수의 현역시절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관전한 경기는 201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조별예선 최종 라운드 아르헨티나 클럽 아르헨티노스 주니오르스와 브라질 클럽 플루미넨세의 매치업이었다. 두 팀 모두 승리하기만 하면 다음 라운드(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치열한 경기가 예상됐다. 더욱이 아르헨티나-브라질 팀 간의 대결이니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작은 한일전처럼 뜨거운 분위기가 조성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경기 시작은 밤 10시. 밤 10시에 킥오프를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싶지만, 아르헨티나에선 보통 9시쯤 저녁 식사를 하니 그리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6~7시 전후로 저녁을 먹고 보통 7~8시에 주중 경기가 열리는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을 뿐, 남미 축구팬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시간대다.
내가 경기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직 9시쯤이어서 빈자리가 많았으나, 경기 시작 10~15분 전부터 그야말로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아르헨티나 축구 응원의 전통 중 하나, 휴지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한다. 주 투척 지점은 상대팀 골 에어리어. 실제로 플루미넨세 골키퍼는 전반전 진행 중 골킥을 하다 이때 뿌려진 휴지에 발이 걸려 미끄러졌고, 공은 터치라인을 벗어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오르스의 드로인이 선언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팬들은 바로 이런 상황을 원한 거겠지.
90분이 제법 빨리 지나갈 정도로 치열했던 경기는 플루미넨세의 4 대 2 승리로 끝났다. 골도 많이 터지고, 꽤 재미있는 경기였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경기력이 K리그보다 월등한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평생 프로축구 한 번 안 보다가, 남미 여행 와서 처음으로 축구 보는 사람들은 "와! 역시 이게 남미축구구나. K리그랑은 차원이 다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땐 K리그나 AFC 챔피언스리그보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아니었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일 수는 있어도, 다른 차원은 아니었다고 본다. 가끔 클럽월드컵에서 아시아 클럽과 남미 클럽이 맞붙을 때 엄청난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처럼.
축구의 재미는 경기 자체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남미 클럽 축구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그런 것이 있었고, 우리가 참여하는 AFC 챔피언스리그에는 아직 그만한 무언가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날의 뜨거운 분위기는 경기 후에도 이어졌다. 아니 더 크게 증폭됐다. 원정팀인 브라질 클럽 플루미넨세가 승리하자 아르헨티나 관중들이 웅성이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우려했던, 해외 토픽에서나 봐왔던 축구장 소요사태가 일어나려는 분위기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그 상황을 최대한 즐겨보려 했지만, 막상 관중들이 경기장 안으로 난입하고 경찰들까지 진압하러 모여들면서 제법 긴장됐다. 그와중에 내 옆에 앉아 있던 브라질 여행자 필립은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 원정팀이 이기거나, 아르헨티나에서 브라질 원정팀이 이기면 항상 혹은 '항상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해프닝에 불과하니 이런 축구문화를 즐기란다.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이 꽤 많이 늦어졌지만, 투어 프로그램 차량을 통해 그런대로 편안히 컴백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혹은 남미에서 축구를 보는 게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지나친 안전 불감증 발언이 되겠지만, 그런 걱정이나 두려움 때문에 절대 가선 안 될 장소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경험했다. 보통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성격(타인에게 어느 정도 무관심하고, 거리를 두는)을 생각해보면 경기장에서도 마음 편히 축구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다만 소매치기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건 경기장뿐만 아니라 지하철, 거리, 시장 어디든 존재하는 것이고 심지어 아르헨티나에 국한된 것도 아니니 알아서 주의하는 수밖에. 축구장에 갈 때는 교통비 정도의 돈만 챙겨가고, 카메라는 경기 내내 몸 가까이 지니고 있으면 별다른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축구팬들은 축구를 열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지,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 아니니까.
글, 사진 - 김다니엘 ('하루쯤 축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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