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몸도, 마음도 너무나 추운 나라야. 그래서 몸도, 마음도 따뜻한 곳으로 떠나고 싶어.
소설엔 계나가 한국을 떠나고 호주에서 사는 이유와 삶이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다각도로 표현된다. 그러나 시간 제약이 있는 영화에서는 감독이 의도를 가지고 몇 가지 사건을 추리고, 또 추가하기도 하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좀 더 뾰족하게 다듬은 느낌이었다.
계나가 한국에서 추위를 힘들어 하는 모습이 유독 부각되는데, 이는 《추위를 싫어한 펭귄》 이야기와 이어지면서 한국 청년들의 매서운 추위가 더욱 와닿는다. 경윤의 죽음은 여기에 정점을 찍어준다.
나는 고아성보다 조연 배우들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추운 겨울에 맨발의 슬리퍼 차림으로 등장한 경윤부터, 우영우의 권모술수 변호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완벽하게 뉴질랜드 유학생으로 나타난 재인, 이 아줌마는 진짜로 뉴질랜드에서 유학원 할 것 같다고 느꼈던 김지영까지. 조연들의 연기가 훌륭해서 필모를 다 찾아볼 지경이었다.
경윤이 너무 마음 아팠어.... 연기 왜 이렇게 잘하세요
소설의 스토리와 대사들이 익숙했지만, 영화는 감독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소설과 비교하게 되기 보다는 영화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다른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좋았다.
경윤이가 처음 등장할 때 엄동설한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맨발이 클로즈업 된다. 춥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발가락을 비추는 앵글에서, 한국 사회가 요즘의 청년들에게 얼마나 냉담한지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 영화에서 발 클로즈업은 또 한 번 나오는데, 계나가 뉴질랜드의 해변에 앉아, 딱 봐도 따뜻해 보이는 모래밭에 발을 꼼지락대는 장면이다. 뉴질랜드에서 계나의 발은 편안해보이고 자유로워 보인다.
한국에서 창백했던 계나의 피부는 뉴질랜드에서 구릿빛으로 빛난다. 영어를 못 하고, 외국인이라 냉대를 받아도,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따뜻한 것 같다.
한국은 너무 춥다. 이 추위가 못 견딜 만큼 싫다. 그래서 따뜻한 나라로 떠나고 싶다.
이 논리가 내게는 꽤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어디든 춥지 않겠냐고? 그래도 이곳의 추위와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경험해보지 않고 다른 곳도 똑같을 거야, 하기 보다는 정말로 이곳과 같은지 경험해 보는 게 낫지 않은가?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응원하게 됐다. 꼭 계나가 다시 떠날 필요가 없는 따뜻한 나라를 찾을 수 있기를. 《추위를 싫어한 펭귄》의 파블로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