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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정우 Nov 05. 2021

당신의 생각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사랑하는 스몰톡 주제는 ‘외모’다. 체중 증감에 대한 이야기는 예사고 안색이며 헤어스타일, 화장법까지. 만나는 순간부터 쉴새 없이 날아드는 상대의 외형 변화에 대한 ‘감상’은 대화에 빠질 수 없는 주제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는 날이면 평소에 하지도 않던 화장을 하거나 옷을 새로 사 입고, 살을 빼는 등 소위 말해 없어 보이지(!) 않으려는 다방면의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동창회에 가기 전 한껏 힘을 주는 장면이 숱하게 등장하는 것은 결코 픽션이 아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 같은 과 지인 A가 있었다. 함께 듣는 수업이 많아서 매일같이 보는데도 만날 때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거다. 그러고는 항상 코멘트를 붙인다. 


“오늘은 아이라인을 위로 그렸네?” 

“빨간 립스틱 발랐구나? 잘 어울린다.” 


사회성을 획득한 지금이야 대충 “그래?”하고 재빨리 다른 주제로 넘겼겠지만, 당시에는 매번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지 않고 어색해 했다. 뭐, 사실 딱히 대답이 필요한 말도 아니지 않나. 문제는, 이런 ‘코멘트’가 계속해서 반복되다보니 아침에 화장할 때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거다. ‘잘 안 어울리나? 이렇게 하면 좀 튈려나?’ 그 친구를 만나는 날이면 마치 팀장님께 결재 받으러 가는 것 같은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다. A에게 “불편하니 그만해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못할망정, 언젠가 다른 지인에게 A가 내 화장법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듣고는 화장에 더욱 더 심혈을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때는 외모에 대해 단순히 ‘예쁘다’와 ‘안 예쁘다’의 코멘트가 따라왔다면, 사회에 나와보니  외모가 그 사람의 직급, 혹은 직업을 유추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먼 곳에 출퇴근을 하면서도 초년생 때는 긴 머리와 화장을 유지했다.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엄연히 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이끄는 ‘간사’라는 직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 밖에서 만나는 중년의 업무 파트너들에게 나는 으레 ‘경리 아가씨’로 짐작되었다. 


“간사요.”

“으응?” 

“간사라고 부르시면 되고, 업무 이야기는 모두 저와 하시면 됩니다.”


그 자리에서 정정해주면 대부분 멍청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데, 나는 이 얼굴을 꽤 자주 만났다.어느 날부터인지 긴머리와 화장이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직장은 왕복 세 시간이 걸렸고, 화장을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30분의 꿀 같은 수면시간이 간절했다. 해서, 머리는 짧게 자르고 화장은 과감히 포기했다. 점점 더 몸에 편한 것들을 추구하게 되니 통이 큰 바지, 품이 넉넉한 티셔츠 등 사회가 생각하는 ‘여성’의 그것과는 먼 스타일이 되어 갔다. 야구모자라도 쓰는 날이면 공중 화장실이나 택시 같은 공간에서 나의 성별을 추측하려는 집요한 시선들과 마주했다.


역마의 아이콘답게 그 날도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중요한 짐들을 담은 백팩을 매고 이삿짐 센터에서 나오신 분들과 함께 짐을 나르고 있었다. 그동안은 센터 직원들이 매번 초면인 내게 반말과 하대를 해대는 통에 이삿날이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참지 않고 되갚아주리라.’는 다짐을 했던 터였다. 결심이 무색하게 그 날은 모든 것이 대체로 부드럽게 흘러갔다. 직원들도 거칠기는 했지만 딱히 무례하지 않았고 고요한 요란스러움으로 묵묵히 제 할 일들을 했다. 내 방에 가구를 들이는 순서가 되자 한 직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책상을 여기에 넣어달라고? 이거 안돼.”


미간을 구기고 손사레를 치며 자신의 몇 십년 경력까지 들먹이는 그는 존댓말 같기도, 반말 같기도 한 요상한 화법으로 주장을 계속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답을 했다.


“돼. 내가 미리 가로 세로 크기 다 재 봤지. 넣어봐요.”


마치 맞춤으로 제작한 것마냥 책상은 제자리를 찾았다. 머쓱해하던 그는 다른 일을 찾아 자리를 떴고, 일이 거의 정리된 후 약간의 시간이 나 믹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그는 근처에 앉아있던 내게 슬쩍 물었다.


“혹시 군인이에요?”


그래, 차라리 군인으로 알고 있어라. 나는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대답을 피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최종 판단으로 내려지기 전, 나는 그의 머릿속에서 바삐 일어났을 논리 전개 과정을 알고 있다.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편한 옷차림이 우선은 내 나이 또래의 여성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약간의 미소도 짓지 않는 무표정과 딱딱한 말투가 그 ‘다름’에 쐐기를 박았겠지. ‘보통의 이 나이또래 여자들과는 다르다. 왜지? 아, 군인인가!’ 


소소한 외모평가부터 외모를 근거로 한 평가 혹은 추측까지, 한국에서 외모를 둘러싼 에피소드들은 차고 넘친다. 내 외모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는 경험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독일에서 외모 이야기는 사실상 금기에 가깝다.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친구들을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외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옷이 어떻다는 이야기 또한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계 독일인인 친구와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 사람들은 옷 잘 입잖아. 네가 입는 옷들도 되게 예뻐.”라는 간접적인 코멘트를 들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정도다. 


유럽지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유럽 생활의 장점은 단연 외모평가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다. 상황에 따라 옷이나 머리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하다고도 하지만 체형과 얼굴 등 ‘타고난 것’,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코멘트는 상황을 막론하고 금기시된다. 그렇다 보니 독일에서는 외모에 대한 강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어떤 옷을 입고 나가더라도 평가받지 않고, 살이 찌고 빠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믿음은 너른 자유가 되어 돌아온다. 


한국에서도 최근 외모평가를 지양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는 말은 상관없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칭찬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고, 미추에 대한 기준은 모두 다르기에 기본적으로 어떤 말이든 ‘상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라면 하지 않는 것이 맞다. 긍정적인 평가라 하더라도 타인의 시선이 인지되는 순간 중심은 내가 아닌 실체 없는 타인 그 자체로 옮겨가게 되어있다. 화장할 때마다 내가 아닌 친구 A의 시선을 손끝에 담았던 내가 그랬듯 말이다. 


겉모습만으로 나는 하루아침에 경리가 되기도, 군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인식되는 두 이미지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나‘라는 알맹이는 변함없이 동일했다. 오직 외형을 바탕으로 한 타인의 평가와 감상에 조소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케케묵은 격언은 2021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다 알 때도 되었건만!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허름한 차림의 손님이 백화점 명품관에서 불친 절한 서비스를 받고 열이 받아(!) 그 매장의 물건을 모두 결제하는 장면이다. 이런 류의 일화들에 대중은 ‚사이다‘, ‚참교육‘ 따위의 단어로 통쾌함을 표한다. 모두가 조금씩은 외모로 재단하는 사회 분위기에 크게 한 방 날리는 꿈을 꾼다는 방증이 아닐까. 물론 그 방식은 개인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누군가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멋지게 가꾸려 노력할 수도, 아니면 애초에 돈이 어마어마하 게 많은 부자가 되기 위해 소처럼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굳이 백화점을 갈 필요도, 명품을 싹쓸이할 몇 십억의 자산이 있을 필요도 없다. 


그냥, 외모에 대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다. 통쾌한 한 방은 아무것도 날리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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