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환갑을 눈 앞에 둔 엄마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이제 엄마 나이에 어디 나가서 일도 못해. 다 삼사십대만 찾지, 누가 육십을 뽑아줘? 떡볶이 집 주방 직원도 삼십대만 뽑더라.“ 그리고는 쓴웃음과 함께 가볍게 덧붙이셨다.
„엄마는 이제 끝났어.“
서른이 넘었어도 제대로 된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하는 못난 딸래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을 농담처럼 내뱉을 수 있기까지 엄마는 얼마나 많은 모멸감을 느껴야 했을까. 나라는 존재가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속성 중 단 한 가지로 치환될 때,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아무도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엄마를 상상했다. 마음이, 땅 밑으로 푹푹 꺼졌다.
학교 근처에 자주 가는 마트가 있다. 에데카Edeka라는 슈퍼마켓인데, 그곳에서 물건을 사고 돌아오는 길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내 마음대로 지정한 계산대의 마스코트 덕분이다. 잘 빗은 단정한 머리에 양 옆으로 활짝 핀 미소, 눈을 맞추며 전하는 활기찬 인사까지! 다정한 말씨와 그 마음이 묻어나는 표정에서 늘 잔잔한 감동을 받으며 마트를 나선다.
그 분을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수선화처럼 하얀 봄이 머리 위에 소복이 내린, 추측컨대, 70대의 노인. 노인들은 어딜 가나 많이 볼 수 있지만, 왜인지 마트 계산대에서 노동을 하는 70대의 노인을 보는 것은 아주 생소한 일이었다. 한국을 떠올려보면 주로 마트 계산대에서 일 하시는 분들은 3-50대의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워낙에 직종별로 특정 성별과 연령대의 차이가 뚜렷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마트 직원=4-50대 여성‘ 이라는 공식을 세워 두었던 것 같다.
내부세계에서 통용되는 공식과 외부세계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의 괴리는 세상을 흔들어놓는 충격을 주는 법이다. 아! 외마디 깨달음과 함께 일상의 풍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30대 여성 버스 운전사, 50대 남성 사서, 70대 남성 택배기사, 50대 여성 우체부… 독일 사회에서도 연령과 성별에 따른 경제활동의 제한은 늘 문제점으로 지적되지만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 경계는 분명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옅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에서는 <일반 평등대우법>이라는 이름으로 성별, 나이, 성적 지향, 장애, 인종, 종교라는 6가지 특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노동과 일상의 영역에서 이 특성들에 근거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차별들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적어도 시각적으로 그 차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게 서서히 누군가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특별히 악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환경을 의심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보이면 궁금해지고 궁금하면 이해하고 싶어진다. 한 개인을 이루는 다양한 속성이 그저 한 존재의 일부분임을 인정받고 마음껏 드러내며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가려진 곳곳의 존재들을 찾아내어 비추는 제 3의 눈을 열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