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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Feb 14. 2020

욕망할까, 희망할까 미술 수업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

분명히 미술 수업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종이도 연필도 펜도 붓도 없다. 

이제 3월이면 고등학생이 될 어린 청년에게 꼬맹이들이나 봄직한 “빨간 구두 이야기”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빨간 구두(분홍신) 외에도, 인어공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벌거숭이 임금님, 엄지공주, 백조왕자, 나이팅게일, 눈의 여왕 등 지난 100년 동안 줄곧 들렸던 이야기를 만든 작가다. 그리고 지난 40년 간 페미니스트 여성학자들이 가장 미워라 했던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가난한 신발 수선공이었다. 그래서인지 안데르센의 동화에는 유독 발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인어공주는 인간처럼 걸을 수 있는 발을 갖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어야 했고, 빨간 구두의 카렌 또한 두 발을 잘라 내어야만 춤을 멈출 수 있었다. 또 <눈의 여왕>에서 소년을 구하러 나선 소녀 겔다는 자신이 신고 있던 빨간 신발 한 켤레를 강물에 버려야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발 패티쉬도 유명하다) 안데르센은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주는 ‘발’과 여성의 욕망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무엇인가 대가(代價)를 치르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혹자들은 안데르센이 못생긴 외모, 부족한 사회성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하여 자격지심이 심한 데다, 허영심과 사치가 심했던 욕망 덩어리라고도 했고, 또 그가 동성애자인데 숨겼다고도 봤다. 안데르센은 후대 여성학자들로부터 여성비하 및 여성 혐오의 정서가 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진실은 안데르센 자신만 알겠지만.


어린 청년에게 물었다.

“사실 성당을 가면서 화려한 구두를 신고 주목받고 싶었던 관종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런 저주에 걸린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지. 하지만 안데르센이 살던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는 거. 근데 더 이상한 건, 이러한 그의 콘텐츠가 논란이든 공감이든 여하튼 약 1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는 거야. 그것이 좋은 작품의 조건이야. 그래서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우리는 안데르센이 주목한 “욕망의 빨간 구두”라는 物의 뮤즈(Muse)에 여전히 매혹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출발은 여성의 사회적, 신분적 지위 상승에 대한 욕망을 대변하면서 어딘가 권선징악의 '틀'에 머물러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빨간 구두”들은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 작가 라이먼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의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 빨간 구두는 조금 더 강력한 권력과 마법을 가진 채 ‘집’을 소환시킨 존재였고, 천재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판의 미로>에서는 악마와 대적하는 공주 오펠리아의 발에는 단단한 군화 모양의 빨간 구두가 신겨졌다. 그리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이르면, 빨간 구두는 더 이상 벗어던져야 할 이유가 없는 정당하고 당당한 욕망, 바꾸어 말하자면 감히 욕망해도 좋을 어떤 ‘희망’이 되었다.



여기까지 가만히 보고 듣던 어린 청년이 입을 열었다.

“쌤… 문득 팍 하고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우의 대사와 똑같아서 깜놀)

“응, 뭔데?”

“웹툰 중에 <금요일>이라는 것이 있어요. 거기서 어떤 사람이 소원을 빌었는데, 희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게 해 달라 하는 소원이었나 뭐 그래요. 그때 그 소원을 실현시켜주는 애가 ‘좋다. 대신 그 끝은 행복이 아닐 것이다’ 하면서 소원을 들어줬는데, 결국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어머, 어떻게 되었는데?”
 “흐흐. 마지막 장면이 퀭한 눈으로 정신 병원에 있는 모습이었어요. 바라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니까, 매번 매 순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까.”

"...욕망은 채웠는데, 희망을 잃은 거구나."


지난 몇 달 동안 어린 청년과 함께 했지만 그토록 눈을 반짝이며 이토록 오랫동안 이야기를 쏟아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이는 정말이지 질서도 정연하게 조목조목 보았던 이야기들과 들었던 생각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 너는 생각이 다 있었구나! 하는 생각.


자신의 일부를 내어 준 대가로 얻어낸 빨간 구두는 욕망이었으나, 자신의 일부를 다듬어서 품어내는 대가로 얻는 것은 희망이었구나. 아픈 어른을 돌보지 않고 무도회장에 가서 춤을 추고 싶다는 대가로 잘라내야 했던 발은 욕망의 값이었으나, 힘든 상황에서도 나의 행복을 위해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었구나.


욕망과 희망은 매우 얇은 막을 가운데 둔 게임이다. 그 게임에서 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어린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전 희망하는 쪽이요. 그게 낫겠어요.”



#맛그림미술교육_수업

#욕망과_희망_사이

#욕망할까_희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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