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가 들려주는 수채화 같은 러시아 문학
그들의 기도가, 그들의 눈물이 과연 부질없단 말인가? 사랑이,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과연 전능하지 않단 말인가? 오, 아니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고 반항적인 심장이 묘 안에 감춰져 있더라도 그 위에 자란 꽃들은 순수한 눈으로 고요하게 우리를 바라본다. 그 꽃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영원한 평화,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화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홰와 무한한 생에 대해서도 말한다.......
354쪽
아르카지 니콜라예비치 키르사노프는 학우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를 초대한다. 바자로프는 아르카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자(아르카지의 아버지 니콜라이와 삼촌 파벨)들과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듯 줄곧 그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바자로프의 마음에도 파도가 일어나는데..
바자로프는 만사를 반항적,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대척점에 있는 감정을 부정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소설 초반에는 바자로프 스스로 마음을 정돈하려 '노력'하는 정도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붙들어 놓기 위해 '애쓴다'고 느껴져 그 역시도 타고난 성정을 죽일 수 없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작품 말미에서 바자로프가 일찍이 불편한 감정들이 이성의 대척점이 아니라 연장선에 위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바자로프의 이중적인 태도는 세대간 갈등을 더욱 잘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어느 한 쪽으로 완벽히 치우친 사상을 고수할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르카지의 삼촌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도 바자로프와 마찬가지로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파벨은 어떤 면에서 바자로프와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동족혐오 비슷한 감정을 일으켰던 것 같은데, 마치 어떤 깨달음을 얻고 만물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젊은이와 염세적인 고뇌의 시절을 지났기 때문에 그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중장년의 관계랄까. 이같은 부분은 <아버지와 자식>의 여러 부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학설을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겠죠? 당신의 그런 상상은 부질없습니다. 당신이 설파하는 유물론은 이미 여러 차례 유행했지만 언제나 논리가 허약한 것으로 결론이 낫죠......."
94쪽
바자로프를 건방진 젊은이로 여기는 동시에 파벨의 젊은 시절 고뇌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바자로프 또한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면 파벨의 말을 납득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바자로프는 파벨의 태도에 오만함을 느끼고 파벨 또한 바자로프를 불손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한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오드콜로뉴로 이마를 조금 적시고는 눈을 감았다. 눈부신 햇빛에 비친 그의 야윈 아름다운 머리가 죽은 사람의 머리처럼 하얀 베개 위에 얹혀 있었다....... 사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289쪽
결국 파벨은 바자로프와의 결투로 생사를 넘나든다. 신념에 따른 행동으로 죽음을 맞이할 뻔한 파벨은 심경의 변화를 겪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완강히 부정했던 페네치카와 니콜라이의 사이를 인정한다. 그런 파벨을 저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아버지와 자식>에서 진짜 죽음을 맞이한 인물 또한 죽음을 극복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 싶은 생각에 잠겼다. 투르게네프는 두 죽음(가치관의 소멸, 영혼의 소멸)을 인간은 죽기 전까지 성장하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도구로 이용한 것 같았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아버지와 자식>, 바자로프와 아르카지는 당대 신인류라지만 21세기에 사는 나에겐 이미 한참전에 세상을 떠난 먼 과거의 인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잔존하는 갈등 또한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문제들도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오만으로 점철된 인물들도 자연의 섭리 앞에선 덧없는 존재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놓이고 나서야 오롯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음을. 그래서 투르게네프의 자연을 찬양하는 묘사는 인간은 우주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더욱 부각한다.
다른 러시아 작품에서 등장인물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희화화하는 모습과 복잡한 갈등구조가 불편했다. 자연스럽게 러시아 문학에 편견을 가졌고,어느 순간부터 러시아 문학은 마음먹고 읽어야할 숙제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투르게네프는 한 인물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부드럽게 채색된 수채화 같은 그림'(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강의 中)으로 등장인물과 작품의 배경을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인물과 사상에 대한 증오가 섞인 표현이 적고, 작품 속 사건에 애정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강렬한 러시아 고전에 피로함을 느끼는 근래라면 투르게네프의 대표작 <아버지와 자식>으로 마음의 요양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