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다해야 하는 이유
'OO 병동 심장내과 코드블루, 코드블루'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쯤 환자의 심정지를 일컫는 코드블루 방송이 병원 전체에 울렸다. 심장이식을 담당하고 있는 나는 주로 심장내과 환자를 만나기 때문에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얼마 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함께 일하는 심장내과 교수님의 전화였다.
"방금 코드블루 방송 들었죠? 확인해 보니 제 환자인데 V-tach(심실빈맥)이 멈추질 않고 의식이 쳐져서 일단 인공호흡기 넣고 에크모 삽입도 고려하고 있어요. 다시 기능이 돌아올 심장이 아닌 것 같아서 심장이식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보호자에게 대략적인 설명은 드렸는데 선생님이 한번 만나서 보호자가 동의하시면 심장이식 대기자 등록해 주세요."
통화를 마치고 보호자에게 연락하여 약속을 잡았다.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발걸음을 옮겼다. 보호자의 첫인상은 현재 상황이 실감 나지 않는 듯한 표정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상담실로 자리를 옮겨 현재 펼쳐진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 의료진이 고려하고 있는 치료 계획, 심장이식 가능성에 대해 설명드렸다. 보호자는 사업을 하시던 분이었는데 자녀도 다 키웠고, 노년에는 사업을 줄이고 남은 삶을 즐겁게 살아보려고 하던 차에 아내가 작은 가게를 운영해 보고 싶다고 해서 지원하고 격려해 줬는데 가게 운영을 하면서 심장에 부담이 간 건 아닌지 자책하며 낙담하셨다.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나는 하던 일이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라고, 너무 자책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현재 상황이 좋진 않지만 의료진이 제공하는 최선의 치료와 돌봄, 가족분들의 적극적인 지지, 환자 본인의 의지와 회복 능력이 합쳐지면 심장이식 치료 과정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상담이 끝날 때쯤 심장이식 대기자 등록 신청서에 보호자 서명을 받았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서 대기자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는데 환자의 국적이 한국이 아닌 외국 국적이었던 것이었다. 오랜 외국 생활로 외국 국적을 취득한 탓이었다. 이럴 때는 절차가 복잡해져서 외국인 등록 사실 증명서와 출입국 사실 확인서 등이 필요한데 이 서류들은 주민센터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 시계를 보니 4시를 넘기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바로 보호자에게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아까 설명드렸던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유세웅입니다. 제가 등록 절차를 진행하던 중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심장이식 대기자 등록은 하루라도 빨리 등록하는 것이 가산점 받는데 유리해서 번거로우시겠지만 주민센터가 문 닫기 전에 서류를 발급받으셔서 병원으로 제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호자는 수화기 너머로 알겠다고 답하며 급히 주민센터로 향했다. 기다리다 보니 시간은 퇴근 시간인 5시를 넘어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업무 폰으로 보호자의 연락이 왔다. "선생님 제가 많이 늦었지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보호자로부터 서류를 건너 받은 나는 급히 이식 대기자 등록을 진행했다. 이제는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서 쉬고 있을 무렵 KONOS(Korea Network for Organ Sharing,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 연락이 왔다. 기증자가 나타났으니 해당하는 기관은 수혜 리스트를 확인하라는 연락이었다.
리스트를 확인하던 중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 급히 등록했었던 환자의 순위가 꽤 높아서 충분히 수혜 기회가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보를 취합하여 심장이식팀 의료진에게 공유했고 일단 신청하고 최종 순위를 기다려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2시간이 지났을 무렵 KONOS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우리 병원 환자가 최종 1순위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증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 늦게 퇴근했지만 급히 등록을 진행했던 순간들, 환자 및 보호자의 간절한 마음이 겹쳐지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심장이식팀에 진행 상황을 고려하고 이식 전 Cross matching 검사(기증자와 수혜자의 혈액을 반응시켜 이식 전 거부반응을 예측할 수 있는 검사)만 통과하면 수혜 확정하기로 결정되었다. 검사는 면역학 검사실 임상병리사 선생님들께서 밤새 진행해 주셨다.
'OOO 님 기증자와 시행한 Cross matching 검사 결과 음성입니다.'
새벽에 문자 연락이 도착해 있었고, 심장이식을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심장이식 업무를 맡고 있지만, 보통 응급한 경우라도 대기자로 등록한 당일 수혜자로 선정되는 경우는 드문데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환자의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왠지 무사히 수술을 받고 회복되실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심장 적출 팀이 배정되었고 나도 합류하여 구급차를 타고 기증자가 계신 병원으로 향했다. 기증자를 추모하는 기도를 드리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심장의 상태는 양호했고 심장을 잘 포장하여 안전하고 신속하게 돌아왔다. 사이렌 소리를 듣고 도로에서 양보해 주시는 수많은 시민들 덕분에 1분 1초를 아껴서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수술실 앞에는 환자의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고 환자가 수술을 잘 받고 회복하시길 기다려보자는 말을 남기고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의식도 돌아왔고, 승압제 용량도 높지 않고, 출혈도 심하지 않고, 소변도 잘 나왔다. 수술이 잘 된 것이다. 환자는 며칠 지나지 않아 인공호흡기도 제거하고 일반 병실로 이동하여 치료받던 중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퇴원을 하기 전 일상을 잘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퇴원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때 나는 기증자에 대한 마음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시게끔 다시 한번 설명드린다.
"곧 퇴원을 앞두시고 있는데, 이것만은 늘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혼자만의 삶이 아닌 세 사람의 삶을 대표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기증자의 삶. 둘째, 나로 인해 수혜 받지 못한 다른 대기자의 삶. 셋째, 심장이식이라는 선물을 받은 나의 삶. 기증자와 가족분들이 가장 원하시는 건 사랑하는 이의 일부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건강하게 잘 뛰고 최대한 오래,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증자의 뜻을 이뤄드리는 방법은 건강 관리 잘하고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고, 삶을 긍정하며 주변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테니 앞으로도 우리 잊지 말고 잘 살아가 봅시다."
내 말을 듣던 환자와 보호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마움과 미안함, 다양한 감정이 섞인 탓이다. 환자와 보호자는 잘 살아가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퇴원했다. 퇴원 후에 첫 외래진료를 보러 오신 날 만나서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얘기를 나누다가 보호자가 입을 여셨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선생님을 만났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주민센터를 갔던 날 환자 본인이 아니었기에 서류를 발급받으려면 환자의 신분증이 필요했는데 마침 환자가 중환자실로 이동하면서 간호사로부터 짐을 전달받았고 그 안에 지갑이 있었어요. 만약 그때 지갑 속 신분증이 없었다면 그다음 날 등록이 되었을 거고 심장이식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퇴근을 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셔서 등록을 할 수 있었고 기증자의 뜻이 없었다면 오늘도 허락되지 않았겠죠. 어떻게 이렇게 딱딱 맞춰진 건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보호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또 한 번 보이지 않는 손을 느꼈다.
병원이라는 공간 특성상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만 마주치지는 못하겠지만, 진심을 다하는 순간이 모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을 느끼는 순간이 좀 더 많아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심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