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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샘 Mar 05. 2020

기생충 -  불쾌하거나 불편하거나 모두 계획이 있었다

영화 리뷰

작년 한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보고 나오면서 관객들의 표정을 보았다. 보통 영화가 끝나면 한두 마디씩의 떠들썩한 감상평이 이어졌겠지만 내 기분 탓이었을까. 무겁고 묘한 침묵만이 흘렀다.



영화는 승승장구했다. 작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올해 2월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아카데미상의 90년 역사상 외국어영화가 상 받은 적은 없었다. 경천동지 할 일이라고 할 만하다.



계층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변방의 국가 한국에서 만든 영화가 자본주의의 최첨병 미국 땅에서 한해의 최고의 영화로 인정받은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시상식을 TV조선에서 생중계했다는 점이다. 한때 블랙리스트였던 봉준호 감독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는 시그널이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 가난한 가족 기택네는 신분상승을 꿈꾸며 가족 전체가 위장취업을 하고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부자는 상대적으로 착하게 묘사되었다. 빈자를 양심과 도덕을 저버리는 집단으로 그려낸 것에 대해 분개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 바빴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걸맞게도 작품에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이미지와 상징의 오브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지금도 매일 감격에 젖어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해낸다.


이 정도면 온 세계에 봉준호의 마법이 통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빈부의 문제는 전 세계의 문제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방식으로 추악한 사회문제를 그려내지 않았다.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고 잔인하리만치 스릴 넘치고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웃음이 터지는 블랙코미디다. 그럼에도 어쩐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그것은 각본의 치밀함과 배우들 연기의 훌륭함과 미장센의 세련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생충>은 엔딩 장면에서 한줄기 희망마저 꿈꾸는 이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조롱하는 듯한 냉혹한 현실주의를 그려냈다. 결국 영화관을 나서는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건 뭐지?라는 불편한 감정이 남게 된다.


나에게 봉준호의 디테일을 발견하는 기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감독의 시선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소재로서 수석, 즉 산수 경석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조금 과장하면 수석이 ‘다 했다.’ 자연을 축소해놓은 둣한 바위산의 모양을 한 이것은 처음 영화 첫 부분에서 기우의 친구(박서준 분)가 선물로 준다. 마치 감독이 직설화법이라도 하듯 기우와 기택(송강호 분)의 입을 빌어 ‘이건 굉장히 상징적’이고,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재물운을 상징하는 수석이 영화의 단계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다가 그 돌에 맞아 기우가 기절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영화 후반까지 이어진다.


주인공 기우 곁을 줄곧 따라다니는 수석은 감독이 중요한 상징이라고 하듯이 결국 ‘인간의 탐욕’이 아닐까. 기우는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꿈꾸었던 계층상승은 물거품이 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후에야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이러니하다. 수석을 자연의 한가운데 시냇가에 내려놓는 것으로 욕심을 버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은 없었다. 그건 봉 감독 스타일이 아니다. 인간은 탐욕을 버리려야 버릴 수 없다. 봉준호는 탐욕이 충돌하는 현실세계의 부조리함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그가 바라는 대로 기어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영화로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측할 수 없는 반전과 혈투극 속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이 영화의 원래 제목 ‘데칼코마니’처럼 부자도 빈자도 모두가 서로 함께 기생하듯 공생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빼박 냉혹한 현실주의로 그린 것에 대한 찬사에는 나도 한 표 던진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고 코를 쥐어싼 박사장(이선균 분)에 대한 응징을 보며 부자들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아무리 비난하고 증오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명제 아닐까. 영화의 OST이기도 한 ‘믿음의 벨트’는 박사장의 부인(조여정 분)의 대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감독은 그런 방식으로 아주 조그만 희망의 씨앗을 감춰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전개도 흥미진진한 와중에 흘러나오는 우아하면서도 상승과 하강 곡선을 그리는 듯한 사뿐사뿐한 현악기의 선율이라니ㅡ)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봉준호는 여러 인물의 훌륭한 연기를 이끌어내고 여러 소재와 장치를 숨겨두고 숨바꼭질을 계속하는 것이리라.



이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이 글은 개인 리뷰니까)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 중의 중요한 동기는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의 발견, 영화를 보는 단 두 시간만이라도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다. 모두가 극찬해 마지않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는 봉준호라면 뻔한 스토리와 최루성 설정을 통하지 않고도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관객에게 세상이 살만한 곳임을 알게 해주는 영화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감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물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안 만들고는 감독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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