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 믹스를 본 아이 표정이 밝아졌다. 집으로 돌아와 밀가루와 이스트, 땅콩 섞인 설탕이 들어있는 키트를 뜯어서 호떡을 부쳤다. 반죽이 이렇게 질척해도 되나 싶어 갸우뚱했는데, 포장마차에서 슬라임처럼 늘어난 호떡 반죽을 떼어내던 아주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옳게 됐다는 안도감에 손에 쥘 만큼 겨우 떼어내어 설탕 소를 넣었다.
한 덩어리로 뭉쳐있던 반죽이 어느새 호떡 열 개로 탈바꿈해서 가지런히 쟁반 위에 누웠다. 3천원 주고 산 호떡 믹스로 호떡을 2만원 어치나 만들었다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동그란 달 덩어리 같은 호떡이 한 김 식기를 기다리면서 주방을 정리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묻은 반죽을 떼어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되긴 되네”
내 하루는손에 붙어 제멋대로 늘어나는 호떡 반죽 같았다. 아침에 눈 뜨면 뭉텅이로 반죽해 놓은 시간이 덩어리째 주어졌다. 시간은 많은데 어쩌지를 못했다. 다 쓰지도 못한 커다란 반죽을 깔고 누우면 ‘오늘 나 뭐 했지?’라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매일 아까운 반죽을 내다 버리는 내가 한심했다.
뭐든 만들려면 반죽을 떼어내고 구분하는 일이 먼저였다. 작게 조각내어서 수제비를 끓이던, 길게 밀어서 칼국수를 만들던, 그도 아니면 동글동글 빚어서 호떡을 굽던. 그냥 커다랗게 뭉쳐진 반죽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편이 아침 6시 반에 출근하고, 아이는 방학이라 9시까지 자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반. 그만큼은 내 몫으로 떼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소용없겠단 생각에 남들이 좋다는 걸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여러 가지 미션을 세워봤자 지키지 못하고 좌절할 게 뻔했다. 한 가지만. 딱 한 가지만 시작해 보기로 했다. 수많은 작가가 추천하는 ‘모닝 페이지’부터. 책 ‘아티스트 웨이’에 등장하는 모닝 페이지는 말 그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종이에 아무거나 쓰는 거다.
옥스퍼드 대학 마크가 그려진 A4용지 만한 노트를 펴고 쓰기 시작했다. 연필을 잡아 본 지가 언제인지. 막상 쓰려니 팔도 아프고, 글씨는 태국어와 아랍어 사이쯤 되는 모양으로 찌그러졌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것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뒷장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30여 분 만에 뚝딱 A4 한 장을 썼다. 하얀 화면 앞에서는 멈춰있던 손가락이 연필을 쥐니 어찌 그렇게 자유롭게 춤을 췄는지 신기했다.
그렇게 2주 동안 매일 아침에 연필로 글을 쓰고 있다. 종이에 써놓은 외국말 같은 글씨를 해석 못할까 봐 바로 워드 파일에 옮겨놨더니, ‘모닝페이지’라는 이름의 폴더에 벌써 14개의 글이 생겼다. 당장 책으로 출간할 만큼 멋들어지기는커녕, 브런치에 올리려고 해도 여러 번 손봐야 할 정도로 엉망이지만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났다.
아침에 글을 써놓았다는 사실이 남은 하루를 기분 좋게 했다. 누가 의뢰한 적도 없고, 기다리는 독자도 없는 글인데도 매일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었다. 가뜩이나 책 한 권 밖에 안내서 내가 작가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데 매일 쓰지도 않으면 진짜 작가가 아닌 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책을 내고 나서 ‘출간 우울증’이라고 떠들고 다녔었다. 책이 나오면, 저자가 되면, 인정받는 거라고 믿었다. 당연히 글쓰기를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무기력해졌다. 장작개비 몇 개가 활활 타다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듯, 출간 직후 타올랐던 내 마음에 어두컴컴한 재만 남았었다.
책이 참 좋은데 어떻게 알릴 방법이 없다며 독자들을 찾아다닐 수도 없고, 내가 책에 대해서 참 할 말이 많다고 유퀴즈 PD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다. 뭉텅이처럼 주어진 내 하루에서 아침을 떼어내는 것, 그리고 연필로 쓰는 것.
나는 출간 우울증을 이제야 조금씩 털어내고 있다. 매일 아침 연필로 쓰기를 계속하는 한, 글쓰기가 더 이상 두렵고 숙제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감각을 믿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