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선생님'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차선을 선택했지만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꼭 대단한 직업을 말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할머니는 ‘아빠 등골 빼먹을 거냐’며 혀를 찼다. 공무원인 아빠는 외벌이로 우리 사남매를 키웠다. 둘째 딸이 예술을 한다고 하니 기꺼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됐을 땐 ‘유아교육과’에 가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고, 커갈수록 더 깊어진다는 걸 그때부터 알았다. 아이를 잘 키우는 법을 배워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도 나를 사랑한다면서 도무지 사랑하면 할 수 없는 행동을 했으니까. 몰라서 못 하는 거라면 배우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번엔 엄마가 반대하고 나섰다. 기껏 공부시켜 놨더니 4년제 대학씩이나 나와서 어린이집 선생님할 거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뭐 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생전 처음 입에 올려보는 듯한 단어를 어색하게 말했다.
“...... 외교관”
그게 뭐냐고 묻자 엄마는 얼버무렸다.
“있어. 외국 여기저기 다니고 그러는 거래. 너 말 잘하니까, 영어 열심히 배워. 나중에 외교관 하면 딱이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장래희망을 조사하는 칸에 ‘외교관’이라고 적었다. 그게 뭔지는 잘 몰라도 화가나 유치원 선생님보다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생의 희망 직업과 그 아래 부모님의 희망 직업란에 똑같이 ‘외교관’이라고 적혀있었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서 외교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결혼해서 주부가 되었다. 가끔 엄마를 원망한다. 그때 만약 유아교육과에 가도록 응원해 줬으면 내가 오은영 선생님처럼 됐을 거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낸다. 엄마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티브이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오은영은 티브이만 켜면 나온다고 언짢아하면서.
에세이 상담소에서 만난 재경 씨도 어려서부터 소원하던 직업을 갖지 못했다. 어린이집 보육교사, 학원 강사 등을 거쳐 지금은 방과 후 교사로 일하고 있다.
“선생님이시군요.”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진짜 선생님은 아니에요.”
그럼 가짜 선생님도 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말을 바꿨다.
“왜 진짜 선생님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임용고시를 통과 못했어요. 그러니까 진짜 선생님은 아니죠.”
눈은 웃고 있지만 어쩐지 울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을 나도 따라 지었다.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나를 향해 그녀는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중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쳐요. 얼마 전에 ‘시 이어 쓰기’를 준비해 갔을 때였어요. 아이들이 칠판에다가 시를 한 줄씩 이어 쓰게 하는 거예요. 주제를 칠판 꼭대기에 쓰려고 하는데, 제가 키가 작아서 손이 안 닿더라고요. 그 반에 제일 키가 커 보이는 아이에게 좀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근데 애가 화를 내더라고요.”
웃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정도는 선생님이 학생한테 부탁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아이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귀찮게 왜 나한테 시키냐고. 선생님이 키 크는데 보태 준거 있냐고. 거기까진 뭐 사춘기니까 그럴 수 있겠다 했어요. 저도 '알았다'고 하고 더 말을 섞지 않으려 했는데, 뒤돌아서자마자 옆자리 애한테 그러는 거예요. '역시 저 선생님이 수업 만족도 평가에서 1등 못하는 이유가 있다'라고. 대놓고 저를 무시하는 거죠. 눈물이 나는 데, 우는 걸 들키기 싫어서 그냥 뒤돌아 있었어요. 걔들이 담임선생님한테도 그럴까 싶어 서럽더라고요.”
재경 씨는 중학생 때부터 선생님이 꿈이어서 교육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임용고시도 봤다고 했다. 몇 번 도전을 했지만 결국 시험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나니 재취업하는 데에는 교육대학원을 졸업장이 가장 쓸만했단다. 그렇게 그녀는 방과 후 교사가 됐다.
“제가 수업 준비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일주일에 하루밖에 수업 안 하지만, 좀 더 새롭고 재밌는 거 없나 연구하고 자료도 찾아봐요. 저희 언니가 저보고 그랬어요. 네가 더 선생님 같다고.”
“언니도 선생님이신가 봐요?”
그녀와 쌍둥이인 언니는 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근무 중이라고 했다. 정작 그녀의 언니는 어린 시절 한 번도 교사의 꿈을 꾸지 않았지만, 점수에 맞춰 교대에 갔다고 했다. 선생님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언니를 볼 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저는 진짜 원해도 꿈을 이루지 못했어요. 원하지 않았지만 제가 꿈꾸던 걸 이루어낸 언니가 부럽기도 해요. 하지만 언니 말처럼 저는 ‘진짜 선생님’ 못지않게 열심히 하거든요. 그리고 두 아이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지금의 삶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진짜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주변 열 명을 떠올려보면 어려서부터 희망하던 오랜 꿈을 이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그 한 명 마저도 자신의 꿈을 이뤘지만 만족하며 지내는 것 같지는 않다.
“재경 씨는 차선을 선택했지만, 최선을 다해 살고 계시네요.”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랫동안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듯 천천히 대답했다.
“맞아요. 제가 정말 그렇게 살고 있었네요.”
나는 다시 물었다.
“재경 씨, 에세이는 쓰고 싶지만 진짜 선생님이 아니라서 학교 얘기를 쓸 수 없다고 하셨죠?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그분들이 그럼 다 가짜 선생님일까요? 저는 재경 씨의 경험을 글로 나눠주시면 직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차선의 선택을 했지만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 지도 알 수 있을 거고요."
임용고시를 통과해야 진짜 선생님이고, 통과하지 못하면 가짜 선생님인가? 나는 결국 처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활짝 웃었다. 어느새 눈물이 마른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빛을 나만 볼 수 있는 게 아쉬웠다.
그녀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아이들은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조금만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차선을 선택했지만,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얼마나 빛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