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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Jan 19. 2022

하코다테 과내여행 (4) : 기대와 실망의 상관관계

Jan 14, 2017

'날씨요정'이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여행을 떠날 때, 높은 빈도로 좋은 날씨를 동반하는 사람을 가리켜 농담 삼아 부르는 말이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여성의 경우 '하레온나(晴れ女)', 남성의 경우에는 '하레오토코(晴れ男)'라 부른다. 다이센에서 나는 자타공인 '하레온나'다. 내가 온 뒤로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마다 날씨가 맑았기 때문이다. 여행 시작 전, I는 이번 여행도 분명 날씨가 좋을 것이라며 날 대신해 호언장담 했었다. 그러나 애당초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그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조금씩 흩날리고 있던 눈발은 저녁이 되면서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일정은 야경 명소로 알려진 하코다테야마 전망대였다. 하코다테의 야경을 두고 세계 3대 야경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일본 3대 야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두 수식 간 오차 범위가 너무 크지 않은가 싶긴 하지만, 사실이 어떻든 상관없다. 빛으로 물든 밤의 경치는 언제나 아름다우니까. 전망대가 있는 산 정상까지는 로프웨이를 타고 올랐다. 눈보라가 심해 운행이 중단되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정상 운행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관광객은 로프웨이 한 대의 정원을 순식간에 채워버릴 만큼 많았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여행자의 마음가짐으로 채워나간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늘 실천이 문제지만.


전망대에 올라 본 풍경은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웠다. 눈보라로 인해 시내 전경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대가 높아 매서운 칼바람까지 불었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다 못해 바닥으로 내던져진 얼음처럼 산산조각 나 버릴 것 같은 날씨였다. 그런데도 주변의 다른 관광객들은 태연하게 눈보라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일행 중 누군가 모처럼 온 하코다테니까 우리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인생에는 때때로 포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잠자코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휴대폰의 배터리가 먼저 방전되고, 이러다 나도 방전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거짓말처럼 눈구름이 걷혔다.


기대는 자주 빗나간다.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제멋대로 기대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지나치게 부푼 기대는 어느 순간 한계치에 도달한 풍선처럼 펑하고 터져버린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실망이라고 부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기대와 실망의 상관관계는 대개 그런 식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여기엔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실망도 기대만큼이나 자주 빗나간다는 사실이다.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멎은 자리에 한순간 빛의 물결이 펼쳐지듯이. 실망스러워서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은 순간에, 삶은 때때로 기대 이상의 풍경을 선사한다.


수천만 개의 빛으로 넘실거리는 하코다테의 밤을 내려다보며, I는 '하레온나'의 기운이 돌아왔다며 기뻐했다. F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삶이라는 지난한 여행을 지탱하게 하는 많은 순간이 있다. 하코다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야경을 만났던 순간도, 그런 순간 중 하나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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