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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 Jul 31. 2021

2. 동물의 숲은 미끼였다

이번엔 게임

그에게 ‘알파와 오메가’인 삼국지 챕터를 비교적 수월히(?) 넘어가자 그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게임의 세계에 풍덩 빠지게 해 주리라… 미래의 와이프와 나란히 게임을 즐기는 청사진을 그리는 모양이었다. 궁극적인 목표점은 <삼국지 14> 일 테지만, 그 기대는 애저녁에 접도록 했다.


“70kg까지 빼면 시도해 볼게.”

“…….”


게임하는 남자와 게임 자체에 극도로 방어적인 나의 인식을 바꿔나가기 위한 그의 진단이 시작됐다. 교육용으로 주어진 심시티를 열심히 해 본 적이 있고, 카트라이더, 크레이지아케이드 등 사교형 게임에 기웃거려보기도 했고, 캔디크러시와 애니팡 때문에 하트를 남발한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게임에 진지하게 몰입돼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순도 100프로 범생이..


가히 MBTI 테스트 같은 문답을 통해 내가 그나마 즐겁다고 느낀 게임 경험을 종합해 보니,

1. 대부분이 퍼즐류였고

2. 조작이 쉬워야 함

3. 단판에 끝나는 게임, 짧아야 함

4. 길고 스토리가 나오면 재미를 잃음

5. 귀여운 거 좋아함

등이었다.


내 성향을 진단한 그 첫 처방은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었다. 번개와 같이 결제부터 설치까지 완료한 닌텐도 스위치를 내밀었다. 때는 코로나19가 막 창궐하기 시작 2020년 봄. 벚꽃축제는 죄다 취소되고 연애 초반에 갈 데도 없는데 닌텐도 속 내 푸른벚꽃섬(구린 이름임, 왜들그리다운돼있섬 같은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에는 나무마다 벚꽃이 가득했다… 환상적이야…


 순식간에 일주일이 흘러 있었다.


폴짝폴짝 장대 넘기로 강을 건너고 종종거리며 섬을 휘젓고 다니는 우리 모아나(플레이어 이름) 너무 귀여워. 곤충과 물고기에 공룡 화석까지 모아서 박물관을 세우고 상점에 내다 팔고, 집을 꾸미고 확장하다 보니 밤낮 안 가리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요일에 산 무가 수요일에 반토막이 되다니… 주식까지 등장하는 동숲 세계에 혼이 쏙 빠졌다.


미친 현실감

그러나 뭐든 끝까지 파지 못하는 나… 각 잡고 꾸며진 다른 섬들을 보니 밀려드는 스트레스.. 게임하는데 스트레스받지 말자, 즐길 만큼 즐겼다 싶을 때 스위치를 반납했다.


게임패드에 익숙해진 나를 이번에는 <위닝>으로 끌어들였다. <아내가 결혼했다>에 축구 좋아하는 손예진 같은 여자가 또 내 남편의 크나큰 로망인데… 축구는 또 이야기할 일이 있겠지만 아무튼 위닝은 나도 좀 관심이 있던 편이었다. 왠지 위닝을 할 줄 알면 낄 데가 많을 것 같고 회사 내 위닝 소모임에도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작을 익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남편이 알아서 나를 호날두로 설정하고 약팀이랑만 붙여주니 약간 천재적인 골도 몇 번 넣고 이겨서 재미났다. 골대 앞에서 무조건 슛만 누르던 버릇을 조금 고치고 그냥 패스와 쓰루패스를 구분할 정도로는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야 호날두

뉴욕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스파이더맨>도 깔아줬다. 실감 나는 뉴욕 거리, 마천루를 가르는 ‘웹질’의 손맛이 뛰어났고 자유를 느꼈으나 보스가 나타나고 싸움이 시작되자 흥미가 뚝 떨어졌다.


<철권>은 게임에 대해 아는 체를 너무 많이 하는 남편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하며 손가락 끝이 벌게질 때까지 게임패드를 두들겼다. 필살기 같은 걸 쓸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두들기면 이기기도 하는 게임이라 마음에 들었다. 스트레스 풀기 용으로 만점백만점.


그런 남편이라도 화합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오버 쿡>에서는 눈물겨운 팀워크를 다질 수 있었다. 우왕좌왕 자꾸 밥을 태워먹고 용암에 떨어지는 나를 팀원으로 하고도 화 한 번 내지 않는 보살, 너는 밥만 해서 그릇에 담으라고 명확하게 지시하고 나머지는 다 처리해주는 착한 남편 사랑해!


“서로의 우주를 확장하며 살겠다”라고, 결혼 청첩장에 적었었다. 아직도 자발적인 취미활동으로 게임을 찾게 되진 않지만, 인생 영화처럼 인생 게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몰입의 경험과 승리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 건강한 취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이 게임을 하면 좀 더 이해해 줘야 하는데.. 넘을 산은 아직 많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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