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당신의 취미를 존중하고 함께하겠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서약
결혼식 사나흘 전, 다른 것들을 처리하느라 미루고 미뤘던 혼인서약서를 지금의 남편과 쓰고 있었다. 자 일단 세가지 정도씩 약속을 하면 되겠고… 서로 원하는 남편과 아내의 덕목을 한 번 이야기 해보자.
나는 부지런한 사랑과 유머와 빵(셔틀 아닙니다) 등을 생각해냈고, 남편은 여러가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요구했다. 취미를 존중해주고 함께해 줄 것.
그래서 결혼식 날 내 입으로 선언을 해 버렸다.
“오빠가 좋아하는 취미를 존중하고 함께하겠습니다. 게임이나 축구 등,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말할 때 짓는 즐거운 표정을 제 즐거움으로 여기며 기쁘게 동참하겠습니다.”
같이 산 지 오늘로 100일.
같이 살기 전까지는 몰랐다. 이 남자, 이렇게까지 관심사가 많을 줄이야. 내가 이 말을 조금씩 주워담기 시작할 줄이야.
물론 알고는 있었다. 그의 전셋집 작은 방에는 온갖 취미가 들어앉아 있었다. 책, 만화, 영화DVD, 피규어, 온갖 게임기, 색색깔의 아스날 유니폼들. 특히 삼국지.. 이문열 삼국지, 만화 삼국지, 게임 삼국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많다는 건 머글 중 머글인 나 같은 사람들이 보기엔 축복이다. 나도 영화와 드라마와 아이돌, 대중문화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다. 덕력으로 충만한 그와 그의 빛나는 눈빛을 보면 진심으로 덕질하는 삶에 축복을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같이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 솔직히… 그가 좋아하는 것들에 샘이 난단 말이지. 이를테면 지금 게임을 하겠다고 나랑 놀아주지 않겠다는 거니?? 나는 별로 재미 없는데 에반게리온 계속 봐야 하니?ㅜㅜ
그와 나는 규칙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진심인 그를 한 번 탐구해보기로 했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지. 걸어다니는 나무위키…덕질도 학습이 되어야. 암기력은 어디서 오는가, 조기교육인가 사랑인가. 덕질은 사랑인가 습관인가 집착인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나도 모르겠다. 고작 100일 같이 산 사람과의 여생이 아주 긴~~~것처럼.
그는 지금도 내 앞에서 브런치에 올릴 삼국지 이야기를 쓰고 있다.
—— <B급 삼국지> 검색해주세요.
아니, 아닙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셔야 합니다!
고통받으면서 행복한 만국의 오타쿠의 남편/와이프/파트너/애인들이여 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