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애월(3)
길을 걸어가다가 돌탑을 발견했다. 나도 근처에서 하얗고 조그마한 돌멩이를 주워서 꼭대기에 올렸다.
눈을 감는다. 소원을 빈다.
소원이란 게 그래. 마음속에만 있을 때는 존재감이 크지 않거든. 그런데 이렇게 언어로 바꾸면 마음에 동요가 생겨. 사람들이 마음을 전한다는 표현을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마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잘 골라진 언어를 전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 만으로 통할 수 있을까요?
#5
8시에 눈을 떴다. 전날 10시부터 꿀잠을 잔 덕이었다. 꿈뻑꿈뻑 몸을 뒤척이다가 10시 즈음 숙소를 나왔다. 해장이 살짝 필요한 게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었다. 근처에 순두부찌개를 파는 예쁜 식당이 있길래 고민 없이 거기로 향했다. 주택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식당 앞에는 잔디가 깔려있는 정원이 있었다. 10시 30분 가게가 오픈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정원에 앉아 필름카메라 사용법을 검색해 보았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필름카메라를 개시할 겸 이번 여행에 들고 왔는 데 사용법을 몰라서 꽤 헤맸다. 필름 한 통에 30상 언저리라길래 금방 찍겠군 했는데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진 찍는 거 자꾸 잊어서 여행 동안 10장도 못 찍은 거 같다. 그래서 요즘 일상에서도 틈틈이 필름 사진 찍는 중! 인생 첫 필름 사진 기대된다. 어떻게 나오려나.
30분 땡 오픈~ 하고 들어가려 했더니 문이 닫혀있었다. 문의 유리로 안을 들여다보니 꽤 오래 영업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내부. 이런, 오자마자 안을 살펴볼걸... 하고 다시 배낭을 멘다.
어차피 아침 먹고 한담해안로로 갈 계획이라 이렇게 된 거 한담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한담 해안 바로 앞에 뷰가 좋아 보이는 식당에서 연어장 덮밥을 먹었다. 날이 덥고 입맛이 없을 때는 살짝 새콤한 음식이 끌린다.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런지 사람이 없어서 2층에 홀로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제주맥주 홀짝이며 밥을 먹는데 때마침 언니에게 영상통화가 왔다. 집에 강아지가 있으면 생기는 수많은 좋은 점 중에 하나는 가족 간 사이가 더 돈독해진다는 것. 언니와 이틀에 한 번꼴로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보고 싶다는 게 이런 마음이구나? 자꾸 강아지의 얼굴이 눈에 아른아른하고 움직이는게 보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래. 카메라를 봐주지도 않는 강아지와 통화하며 아점을 먹었다.
든든히 먹고 나와 한담해안로를 걸었다. 나의 제주 최애 탑5 안에 드는 곳. 올해 2월에도, 7월에도 왔는데 이번에도 또 왔다. 제주를 올 때마다 꼭 들르는 장소다. 매번 들렸지만, 그날의 날씨가 가장 좋았다. 아니, 제주 갔던 모든 날 중에 가장 날씨가 좋았다. 하필 혼자 갔을 때 이렇게 완벽한 날씨라니, 조금 섭섭해...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제주가 나 혼자 와서 여행 안 행복할까봐 이렇게 좋은 날씨를 선물로 준 거 같기도 하다. 좋은 사람과 함께인 여행에서는 날씨가 어떻든 마냥 좋잖아. 혼자 걷는데 비 오면 살짝 10년 전 이별까지 아련해지면서 눈물 날 수도 있음.
날이 좋아서 그런가 바다에는 카약 타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해가 꽤 뜨거워서 나는 탈 엄두가 안 났다. 대리만족으로 구경만 했다.
길을 걸어가다가 돌탑을 발견했다. 나도 근처에서 하얗고 조그마한 돌멩이를 주워서 꼭대기에 올렸다. 눈을 감는다. 소원을 빈다.
소원이란 게 그래. 마음속에만 있을 때는 존재감이 크지 않거든. 그런데 이렇게 언어로 바꾸면 마음에 동요가 생겨. 사람들이 마음을 전한다는 표현을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마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잘 골라진 언어를 전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 만으로 통할 수 있을까요?
문득 꽤 자주 돌탑에 돌 올리며 소원 빌었던 거 같은데 이뤄진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뤄진 적이 없어서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대체로 간절한 게 없는 편이고 그래서 늘 건강하게 해 주세요,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런 두리뭉실한 소원만 빌었던 거 같다. 그렇게 대충 빌면 내가 신이어도 별로 안 들어주고 싶을 거 같기는 해! 그래서 이번에는 꽤 간절히 빌었다. 구체적으로.
날이 워낙 화창한 것도 있지만, 배낭 메고 산책했더니 땀이 송골송골해졌다. 간소하게 챙긴다고 했어도 3박 4일 짐이라 꽤 어깨가 묵직했다. 땀 좀 시킬 겸 카페인 충전도 할 겸 핸드폰 충전도 좀 할 겸 카페에 들어갔다. 이번에 여행하면서 또 새삼 느꼈는데 내 핸드폰 상태가 조금 심각하긴 하더라. 배터리 거의 3시간에 한 번씩 다 닳아서 식당, 카페 갈 때마다 충전기 꼽았다. '물건은 물건일 뿐.' 하고 재화에 마음 안 주는 사람인데도 '문명인이 2022년도 살아가면서 이런 핸드폰 사용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또 평소에 핸드폰 잘 안 만져서 돌아오니 다시 별 생각 없어지긴 함.
나 빼고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내 핸드폰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는데, 그 다정 어린 관심이 좋더라고? 후후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내향적인 관종이야.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니 뇌에 산소가 공급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롱함은 사라지고 눈에 생기가 돈다. 커피랑 같이 케이크까지 한 조각 먹었다. 거의 남기긴 했다. 확실히 나는 단 빵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 거 같아.
통창 앞에 앉아 바다 구경도 하고, 귀여운 강아지 인형을 골라서 깜빡 잊었던 친구의 생일선물도 보내고 카페에서 나왔다. 자, 이제 이번 여행의 힐링코스인 호캉스를 하러 떠나볼까? 호텔이 꽤 외진 곳에 있으니 택시를 타도록 하자. 다행히도 카카오 택시가 금방 잡혔다. 여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체크인은 3시였는데 2시 즈음 호텔에 도착했다. 다행히 얼리 체크인을 해주셔서 조금 일찍 입실했다. 별로 비싼 호텔이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방이 너무 맘에 들었다. 넓고, 쾌적하고, 욕조도 크고, 무엇보다 1층인데 야외 수영장과 이어져있어 문 열고 조금 걸으면 수영장이지 뭐야! 수영장이랑 방을 왔다 갔다 하기 넘 좋더라. 다음에 가족들과 또 오기로 다짐했다. 좋은 걸 먹거나 좋은 곳에 가면 생각나는 게 사랑이라던데. 생각나는 사람이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좋아.
호다닥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가니 아무도 없었다. 대관한 거 같고 좋은데 말이야. 호텔 예약하면서 10월이라 야외 수영장에서 놀기엔 조금 추울 수도 있을 거 같아 걱정했는데 웬걸, 날이 화창해 전혀 춥지 않았다. 한참 혼자 수영하다 보니 사람들이 조금 왔다. 운동(?)을 좀 했더니 살짝 맥주 생각아 나서 맥주와 빵을 사 왔다.
선베드에 누워 맥주 마시면서 책 읽었는데, 칼릴 지브란 아저씨한테 좀 감동받았어. 1800년대에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거 신기했다. 진정한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데 15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좋더라.
고집부리지 말고 살아가야지.
이런 덤덤한 자극이 좋다. 잘 골라진 단어들의 배열이 주는 잔잔한 감동이 좋아. 영화에는 쉽게 지루해지는데 글은 끈덕지게 잘 읽는 편이다. 애정하는 이동진 평론가는 글과 영화에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글은 사람을 좋은 의미로 차갑게 만들어주고, 영화는 사람을 좋은 의미로 뜨겁게 만들어 준다고. 이성의 영역은 그 성질이 차가워서 글과 더 잘 맞을 뿐이라고. 나의 기질은 차가워서 이렇게 동요 없이 공감을 만들어내는 차가움에 자주 매료된다. 그래서 나는 읽는 게 좋다. 쓰는 것도 좋고.
책 좀 읽다가 맥주 좀 마시다가 다시 물 속에서 한참을 놀다 보니 해는 넘어가고 슬슬 추워져서 밖으로 나왔다. 제일 먼저 수영장에 들어가서 제일 늦게 나온 나는 멋쟁이. 방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좀 행복하네.
3-4년 전에 쓴 일기를 보니 To Do List 중에 '이상적인 타인이 필요하지 않은 행복 찾기'가 있던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이렇게 혼자서도 온전히 행복하기가 어렵더라. 좋은 곳에 가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데, 그래서 또 온전히 혼자 행복하기가 어렵긴 해. 아직도 그게 To Do List에 있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어. 동의하긴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혼자서 행복한 게 완전한 행복이라고 믿던 사람이었고,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살짝 출출해져서 미리 사둔 컵라면을 꺼냈다. 물놀이를 하면 컵라면이 먹고 싶어 질 거란 걸 알고 있었지. 커피포트로 물을 끓여 라면에 붓고 기다리는데, 뭔가 허전한 이 느낌... 뭔가 잊은 듯한 이 느낌...
컵라면을 사며 젓가락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면은 불고 있는데 방 어디에도 젓가락은 없고 로비까지 가야 하나 하고 울상 지으려던 순간 화장실에 일회용 칫솔이 보였다. 흠 플라스틱이고, 길고, 2개고...
일회용품 안 쓴다고 서울에서부터 칫솔 챙겨 왔는데, 결국 젓가락 삼아 2개 뜯어서 씀. 지구야 미안.. 난 환경파괴의 주범이야. 심지어 면이 잘 집히지도 않았다. 도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칫솔로 라면 먹기 힘들어요! 따라 하지 마세요!
라면 호로록 먹고 티브이 좀 보다 보니 해가 완전히 졌다. 우연찮게 호텔 바로 앞이 저번에 제주에서 보냈을 때 재밌게 놀았던 펍이라 다시 가보기로 했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며 맥주 한 캔을 더 마시고 나섰다. 문 열고 후문으로 나가니 정말 도보 30초에 위치한 펍. 그런데 빰빰빰빰~ 하는 음악소리 밖에까지 들려서 도저히 혼자 못 들어가겠는 거다.
나.. 이렇게 쫄보였나...?
다시 그대로 돌아서 방으로 돌아왔다. 취기가 좀 올라야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서 맥주 한 캔 더 따고 엠티 가서 놀고 있는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여행이랑 일정이 겹쳐서 못 간 거 너무 슬폈다. 반가움의 격한 표현을 들으며 맥주 마시고 취기가 조금 오르니 갑자기 너무 쓸쓸해졌다. "나도 너네랑 그냥 엠티 가서 놀걸 나 외로어 엉엉" 하고 징징대다가 급 "이제 그만 나가서 놀아볼게."하고 끊음. 재밌게 노는 친구들 보니 같이 놀고 싶어서 속상한 건 속상한 거고, 이미 온 여행 지금 돌아갈 수도 없으니 일단 행복하게 보내야 한다. 자, 나가자! 맥주원샷했더니 취기가 오른 기분이 들었다.
알딸딸해진 나는 더 이상 쫄보가 아니다! 다시 나가서 펍으로 슝 들어감. 저번에 왔을 때는 9시에 와서 놀다가 일찌감치 돌아가서 이렇게 핫한 곳인지 몰랐는데, 이번에는 12시에 들어갔더니 다들 한껏 흥이 올라와 있더라.
때마침 쇼미더머니에 나왔다는 쿤타라는 래퍼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거 오랜만이라 싫지 않아서 혼자서 재밌게 공연 보고, 공연 영상도 찍고, 롱티도 한잔 했다. 둘러보니 혼자 와서 노는 사람은 나밖에 없긴 했다. 그래서 다시 쫄보 모드 발동돼 구석지에서 조용히 둠칫둠칫 함.
미어캣마냥 눈치 보면서 바 테이블 구석에서 롱티 홀짝이니 안쓰러워 보였는지 바텐더 분이 계속 말 걸어 주셨다. 데낄라도 계속 공짜로 주셔서 술 실컷 마시고 여행와서 처음으로 사람이랑 말도 좀 하고 흥 뿜뿜하고 2시에 호텔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누웠는데 편한 침대의 소중함이 새삼... 밀려왔다. 어제 침대 좀 쉽지 않았어. 넓고 폭신한 매트리스, 보송한 침구 너무 소중해. 행복해.
그렇게 행복해하면서도 알긴 알았다.
맥주 - 칵테일 - 데낄라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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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일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