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 Oct 26. 2022

제주의 하늘은 혼자서도 찬란해

혼자, 애월(4)

물건을 보면 두고두고 생각난다는 거 어쩐지 좋았다. 언젠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안게 된다면 물건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두고두고 그날을 기억하게.

그리고 나를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오랫동안 자주 사용할 물건을 선물해야겠다고도 다짐했다.
두고두고 나를 기억하게. 



#6


지옥의 숙취와 함께 눈을 뜬다. 이게 맞나. 여행까지 와서 그것도 혼자 힐링 여행한다고 해놓고 이렇게 과음하는 게 맞나. 이렇게 숙취에 허덕이는 게 맞나. 이게 맞냐고 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냈더니 친구가 "현타가 온 걸 보면 아니지 않을까..." 하고 답장이 왔다. 맞아. 이건 아니다.


10시가 체크아웃이라 일단 짐을 쌌다. 가방 하나 싸는 데에 30분이 걸렸다. 옷 하나 넣고 화장실 달려가기, 신발 챙기고 화장실 달려가기... 의 반복. 기어가듯 방을 나와 체크아웃을 한다. 조식도 못 먹었다. 전복죽 맛있대서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무엇이 들어가든 다시 몸 밖으로 나올 게 확실해서, 아니 사실 냄새만 맡아도 토할 거 같아서 못 갔다.


어슬렁어슬렁 쇼파에 누워있다가 편의점까지 또 거의 기어가서 숙취해소제와 이온음료를 샀다. 액체만 겨우 들이키며 로비쇼파로 돌아가 거의 3시간가량을 누워있었다. 친절한 호텔리어분이 물을 가져다주시면서 뭐 필요한 건 없냐고 물어보셨다. 너무 부끄럽다. 웬 취객이 쇼파에 누워 떠나지 않으니 곤란하시죠...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그렇지만 일어나면 무언가가 쏟아질 거 같은 느낌 아니 확신이 들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오후 2시 넘어서까지 죽어있다가 겨우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 숙취가 조금 가시니 카페인 수혈이 필요했다.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한 30분쯤 걸었을까? 출장 중에 회사 동료들과 들렸던 카페가 나왔다. 경치도 커피맛도 괜찮았던 터라 한번 더 방문하기로 한다. 애월 전분공장. 이름이 마음에 든다. 전에 전분공장이었던 곳을 카페로 개조한 모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부쩍 이런 공장 개조 카페들이 많이 생겼는데 나는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다. 넓은 평수, 높은 층고, 탁 트인 마당까지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구석에 앉아 라떼를 마시며 화장도 좀 하고 앞머리도 좀 다듬는다. 



때마침 카페 마당에 플리 마켓이 열렸다. 언젠가 여행지에서 물건을 사면 사용할 때마다 두고두고 여행의 기억이 떠올라 행복해진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 원피스들을 구경하며 잠시 '살까?' 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의 마음을 끄는 아이는 없었다. 


물건을 보면 두고두고 생각난다는 거 어쩐지 좋았다. 언젠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안게 된다면 물건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두고두고 그날을 기억하게. 


그리고 나를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오랫동안 자주 사용할 물건을 선물해야겠다고도 다짐했다. 

두고두고 나를 기억하게. 


애월 전분공장에서 마주친 원피스들.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샀어도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슬슬 배가 고픈 게 느껴져서 또 202번을 타고 제주 공항 근처 5일장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매월 2일과 7일에 열린다는데 그날이 10월 2일이라서 때마침 시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오면서 구글링하다가 찾은 옛날사거리짜장에 갔다. 시장 내부에 노점처럼 있는 곳인데, 우동이랑 짜장면이 모두 4천원인가 그랬던 거 같다. 해장 겸 해서 우동을 시켰는데 음... 올해 들어 사 먹은 음식 중에 가장 짰다. 웬만하면 참고 먹는 편이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뜨거운 물을 떠다가 2컵을 부었다. 그릇이 가득 차서 더 부을 수 없을 때까지 부었지만 여전히 짜긴 했다... 겨우겨우 먹었다.


시장에서 만난 꽃들

시장을 구경하다 꽃 사진을 찍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왜 늘 꽃 사진을 찍는지 공감이 안됐었는데 지금은 조금 알겠다. 일상에 낭만이 없어서야. 아름다움 말고는 하나의 유용함도 없는 존재라니. 이게 낭만인 거겠지. 낭만을 찾아 떠난 혼자 여행에서 그제야 낭만을 찾았다. 미스터선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 "나는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오."라는 대사가 참 좋았는데, 나도 그랬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이 좋아. 비록 유용하고 덜 아름다운 것만 사게 될지라도. 사진은 꽃을 찍고, 사기는 황금향을 샀다. 황금향은 조금 시큼하고 달았다. 맛있었다. 유용했다.


숙취로 지친 몸을 택시에 뉘이고 공항으로 향했다. '혼자, 애월'의 여정이 막을 내렸다. 이제 꽤 오랫동안 제주에 오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에서 해야 할 것을 다 했기에.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할 무렵부터 빗소리가 들렸다. 서울은 비가 오는구나. 5일 만에 마신 서울의 공기에는 비 냄새가 났다. 공항철도를 타고 달려 집 근처 역에서 내린다. 


.

.

.


이 여행의 막을 내린다. 제주의 하늘은 혼자서도 찬란하다.

작가의 이전글 한담에 마음 한 쪽 두고 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