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하고 강렬했던 처음의 맛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야구(장)를 좋아하고 두산팬이 된 지 9년 차다. 시작은 이랬다. 고등학교 친구 무리 중 한 명이 야구 경기 표가 생겼다며 같이 가자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던졌다. 유일하게 시간이 맞았던 나만 가게 되었고,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10년 만에 그 친구와 단 둘이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야구장에 함께 가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더운 공기를 풍기던 주말 낮의 그날을 기억한다. 야구 경기장 1루 네이비석에 앉아 땀을 식히려고 시원하게 맥주를 마셨다. 기분까지 시원해졌다. 높은 층의 좌석 덕에 송골송골 맺힌 땀 위로 바람도 살살 불었고 푸릇푸릇 녹색 잔디가 깔린 뻥 뚫린 야구장 그라운드를 바라보니 눈까지 편안해졌다. 바삭바삭 치킨에 환상 짝꿍 맥주는 술술 잘 들어가 취기가 돌았다(더울 때 마시는 맥주는 더 잘 취하는 것 같다).
맥주로 흥을 워밍업 시키고, 응원가와 안무를 따라 하니 흥이 '쿵짝쿵짝 덩덕쿵' 흥이 더 올라갔다. 그날 함께 간 친구가 응원하던 팀이자 내가 앉아 있던 응원석 팀은 ‘두산'. 그날의 잠실 야구장의 승자이기도 했다. 이후 나는 유니폼에 선수 이름과 등번호까지 마킹하며 입고 다니는 두산 팬이 되었고, 야구장에서 보는 맛깔난 야구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런 야구의 맛을 사랑하는 조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조카 5명 중 조카 1호가 7살이던 9월 첫 주, 함께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늦여름의 무더위로 생각보다 뜨거웠던 날이었다. 수줍음도 많고 사람이 많으면 표현을 잘 안 하는 조카 1호는 많은 관중들에 놀라고 내리쬐는 햇살에 데워진 의자가 뜨겁다고 울고, 규칙도 모르니 심심하다며 표정이 어두웠다.
하지만 눈은 경기장에서 떼지 못했다. 직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와 팬들의 응원 열기, 이겼을 때의 기쁨 등은 조카도 느꼈으리라. 그 뒤로 나는 야구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그는 '최강 두산 허슬두'를 외치는 두산의 팬이 되었다. 그 후 조카는 영국과 키르기스스탄으로 주거지가 바뀌면서도 인터넷으로 야구 경기를 찾아보고 하이라이트를 확인하며 결과를 나에게 알려주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 그 조카의 가족이 여름휴가 차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강력한 더위의 요즘이지만 휴가 동안 야구장을 최소 두 번은 가야 한다는 조카의 기대와 의지 속에 나도 3년 만에 야구장을 찾았다.
출발 전, 오랜만의 직관이라 모르는 선수들의 응원가와 안무를 미리 찾아보고 연습을 했다.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응원 문구도 써서 준비했다. 역대급 무더위가 이어지던 날들 중 얼굴부터 땀을 흘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야구장을 찾았다. 야구공도 잡겠다고 글러브도 2개 챙겨갔다. 두산이 공격을 할 때면 열심히 스케치북을 흔들었다. 사실 홈경기만 진행하는 이벤트(춤추는 이벤트가 시작되고 춤추면 카메라에 잡히고 랜덤으로 상품을 주는)에 선정되려고 열심히 했다. 야구장을 다닌 지 9년 차지만 이렇게 열렬히 응원한 적은 처음인 듯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카메라는 우리를 잡아주지 않았고 폭염 속 두 번의 직관 모두 패를 했다. 카메라맨도 미웠고 오랜만에 야구장을 찾은 우리에게 안겨준 '패'는 날씨만큼이나 우리 마음을 푹푹 찌게 했다.
조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때문에 선택의 자유 없이 너무 당연스레 두산 팬이 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만 요즘 두산의 성적도 좋지 않고 이렇게 연속으로 지는 경기에 진심 안타까워하는 조카를 보면 짠했다.
하지만 나는 귀여운 야구 메이트가 생겨서 좋다. 나의 야구친구 '조카 1호'. 조카는 얼린 포카리스웨트나 아이스크림을 나는 맥주를 짠하며 안타를 외치고 홈런에 함께 뛰며 좋아하는 시간이 즐겁다. 집중력이 좋은 조카는 내가 먹고 마시느라 놓치는 경기의 일부분을 다 설명해주고, 왜 졌는지 원인 분석까지 해준다.
나에게도 조카에게도 자연스레 두산팬이 된 건 강력한 처음의 맛 때문이겠지.
(두산아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