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주 Nov 19. 2019

훠궈

첫 훠궈, 굳이 따지자면 너와의 첫 저녁.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훠궈가 땡긴다.

맵싹한 국물의 홍탕과 반반으로 주문하면 옆에는 담백한 백탕.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요즘은 마라탕 열풍 덕분인지 훠궈가 흔한 음식이 됐다. 3-4년 전만 해도 훠궈를 파는 곳은 대림동/건대 근처에 가야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곳곳에서 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훠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접근성이 늘어난 점에서 마라탕 열풍이 매우 만족스럽다.


나의 첫 훠궈는 억지로 끌려가서 먹었던 추억이 있다.


대학생 때 방학을 틈 타 영국에 있는 친구를 보러 놀러 갔다가 런던에 살고 있는 다른 친구들과 저녁약속을 하고 만나기로 했었다. 중국계 화예(화교 2세)인 친구는  핫팟(Hot pot, 훠궈의 영어식 이름)을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중국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거절하기 조금 그래 '그냥 뭐..먹지' 하고 따라갔었다.


런던 차이나타운에서 어떤 건물(1층 바깥에는 얄궂은 휴대폰 케이스 같은 것들을 팔던 게 기억 난다)의 지하로 내려가 중국 음식 특유의 쿰쿰한 냄새(당시 나는 중국요리를 잘 먹지 못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가 나는 식당에 들어가 4명이서 훠궈 안에 들어갈 음식들을 막 시켰었다.


소고기, 양고기, 흰 살 생선, 어묵, 그리고 약간의 배추/청경채와 버섯 등 이렇게 시켰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보는 훠궈의 형상은... 찝찝했다.

우선 나는 삼계탕 종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탕들에 들어가 있는 말린 배추를 보면 무언가가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훠궈 안 홍탕에도 백탕에도 모두 말린 대추가 양껏 들어가 있었으며, 홍탕에는 기름이 둥둥 떠있어서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심지어 나는 그 당시에는 (지금도 좋아하지만) 기름진 음식을 매우 좋아하고, 고기는 굽거나 튀긴 것을 더욱 선호했었다.

그런데 샤브샤브라니! 굳이! 고기를 물에 넣어 먹어야 한다니! 심지어 기름이 둥둥 떠있는 물에!


오늘 저녁은 별로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재료들을 조금씩...넣으려 했으나 옆에 있던 친구가 고기를 부어버렸다!

'아니 샤브샤브는 천천히 야채부터 넣어서 채소 육수가 우러나게 먹는 게 기본 아닌가? 맛을 모르는구나 정말.' 그런 생각을 하며 친구가 준 익은 고기를 먹으며 미리 시킨 소스들에 찍어 먹어봤다. (나는 그 때 땅콩 소스와 고추기름이 들어가 두반장 소스 같은 것을 시켰었다. 별로여서 친구의 간장-흑식초 소스를 뺏어 먹었었다)

썩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뭔가 고소하고 생각보다 자극적이고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입 안이 화-하고 돌았다.

'이게 뭐지????'

지금은 안다, 훠궈에 들어간 향신료인 팔각과 산초 열매 것을. 그렇지만 그 때는 이게 뭐지 하며 매운 것을 좋아하고 잘 먹는 나에게 입 안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각은 정말 ..새로웠다. 새로운 맛에 그리고 새로운 자극에 중독된 사람처럼 나는 익은 고기를 퐁당 퐁당 건져 먹었다.


이어 친구가 흰살 생선도 익었다며 내 그릇에 넣어주는데, 속으로 '굳이 생선은..(난 육식파니까!)' 했지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입 안에 넣었다. 흰 살 생선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생선 살이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퍼석하지 않고 부드럽게 부스러지며 생선의 맛이 살아 있는 게 너무 좋았었다. 고기에 이어 생선도 건져 먹으며 첫 훠궈 경험을 만끽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런던 차이나타운에 있던 어느 훠궈집, 내 훠궈 인생의 첫 발걸음이었다.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던 훠궈가  지금 최애 음식이자 소울 푸드로 등극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나에게 아무 의미 없던 친구가 내 인생에서 큰 의미로 남기 시작한 것도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 낯설던 팔각과 산초가 무슨 맛인지 모르면서 그 자극을 즐기고 계속 맛보다 이제는 팔각과 산초가 없는 훠궈는 훠궈라 부르지도 않는다. 낯설고 어색했던 너와 이야기하고 만나고 감정을 키우며 이제 너는 나의 큰 부분이 된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