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함이 없는 구슬이 아니니까.
완벽 : 모자라거나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함.
(출처 : 동아 새국어사전)
완벽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완벽귀조’라는 고사성어에 연관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전국시대 조나라에서 귀하게 여겨지던 보물인 ‘화씨의 구슬(和氏璧)’을 탐낸 진나라에 맞서기 위해, 인상여라는 사람이 ‘구슬을 흠집 하나 없이 가지고 되돌아오겠다’고 다짐한 말이 바로 완벽귀조(完:완전할 완 / 璧:옥 벽 / 歸:돌아갈 귀 / 趙:조나라 조)이고 그 말로부터 흠이 없는 구슬, 즉 결함이 없이 완전함을 이르는 말로 완벽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가 완벽주의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때도, 인식한 후에도 내가 계획한 것들을 100% 해내거나 내 기준에서 만족스러울 정도로 하는 것에 무척이나 매달렸다. 그렇게 여느 날과 같이 완벽주의의 늪에서 허덕이다가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완벽이 뭐지? 진짜 완벽하다는 게 있나? 절대적인 완벽이 있을까?’
단어 하나 쓸 때도 사전을 샅샅이 찾고 더 좋은 단어가 있는지 그렇게 헤매면서 나를 괴롭히는 그 완벽이라는 게 뭔지에 대해서는 왜 근본적으로 생각을 안 해봤을까. 왜 취향이나 세상살이는 뭐든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완벽’이라는 개념에만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완벽이라는 단어와 개념에 대해 의문이 든 순간부터, 내가 그렇게 매달리던 스스로의 만족과 그로부터 오는 중압감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이 나에게는 숨 쉴 수 있는 구멍으로 느껴졌다. 세상에 진짜 완벽한 게 어디 있으며, 내가 만족하는 그 정도가 완벽이라고는 나 말고 누가 느끼는데? 완벽하다고 느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거고 흠이야 찾으려고 하면 기어코 하나씩은 찾을 수 있는데 있지도 않은 완벽에 시달리느라 이렇게 괴로울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이 들면서 우습게도 갑자기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새로운 걸 공부하려고 공책을 사놓고 쓰다가 순서가 바꾸고 싶어질까 봐 애써 사온 공책에는 못 쓰고 괜히 이면지에 썼다가 옮기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두 배로 쓰기 일쑤였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에 한 챕터 더 공부했으면 시험을 더 잘 봤을 텐데. 심지어는 그렇게 옮겨 쓰다가 글씨 하나 틀리면 찍찍 긋거나 수정테이프로 지우고 다시 쓰는 게 힘들어서 그 페이지는 찢어버리고 다시 쓰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상이었다.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냐고 당연히 의문이 들 테고 저런 비효율적인 모습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나도 사실은 그런 내 모습에 매 번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게 안 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질 못하는 걸 어떡하겠나. 이런 내가 싫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가도 그런대로 또 그런 모습을 좋아하기도 해서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다 됐고 그렇게 살다가 잘못된 완벽주의를 버리기 위해서 넌 대체 뭘 했냐고 묻는 질문에 답은 거창한 게 아니라 ‘방금 잘못 쓴 글씨를 찍찍 긋고 그 옆에 그냥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피식 김 빠지는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자체가 정말 큰 도전이었다.
그게 뭐 대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수 없겠지만 잘못 쓴 글씨를 찍찍 긋고 다시 쓰는 게 무엇보다도 힘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고 있다. 미처 몰랐겠지만 당신이 매일 보는 친구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혹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일 수도 있다.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 쓰여졌다. 아주 작지만 너무도 거대했던 이 도전 - 찍찍 긋기 - 를 시도하고 점차 익숙해질 버릇을 하고 나니 내 마음의 벽이나 이상한 습관들을 깨는 게 점점 조금씩 쉬워졌다. 심지어는 재미도 있어져서 그 이후로는 거의 망치 들고 다 부수고 다니는 수준으로 새로운 시도들을 해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고작 공책에 잘못 쓴 글씨를 긋고 그 위에 새로 쓰는 일도 어려웠던 잘못된 완벽주의자가 말이다.
다음 글에서는, 그 무수한 시도들을 하나씩 말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