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킬 홍은화 Jan 13. 2023

메모리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죽음과 같은 잠, 종교와 같은 예술

<메모리아>

: 죽음과 같은 잠, 종교와 같은 예술     



글쎄... 연진아-  

나는 오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를 보고 네가 떠올랐어. <더 글로리>가 떠올랐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지. 만약에 예술을 저급과 고급으로 나눌 수 있다면 너는 저급의 끝에 제시카는 고급의 끝에 있는 걸까 하고 말이야.     


근데 연진아- 그거 아니?

<메모리아>는 그런 구획이야말로 인간의 죄가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아핏차퐁의 영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 언제나 졸렸거든. 아니 꼭 졸았거든 인가.

하지만 싫어할 수도 없었지. 그가 들려주는 태국의 가슴 아픈 폭력과 질병의 역사에 나도 모르게 공명하곤 했거든. 그가 이끌어주는 수 천 년, 아니 영원회귀의 시간 속에 잠시나마(영화 상영시간 동안) 머물다 오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거든. 아니 꽤 황홀했거든 인가.


여하튼, <메모리아>가 끝나고 내 내면에서는 “그럼 넌 고질이냐?”라는 유지태의 외침이 들리더라.

<더 글로리>를 즐기는 사람들과 <메모리아>를 즐기는 사람들도 저질과 고질로 나눌 수 있을까?

아까도 말했지만 연진아-

감독은 그런 질문이 죄라고 생각해. 아니 죄를 잉태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잠깐, 죄를 잉태해 볼게.


사람(타자)에 의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두 부류 중 하나가 돼.

하나는 그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되갚는 사람(어떤 식:고통을 준 사람에게 복수하기도 하지만, 더 약자를 찾아 복수하는 사람도 있거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되갚을 수 없는 사람.

그러니까 연진아- 너와 동은이는, <더 글로리>는 전자가 되겠지?

그럼 후자의 사람들에게 남겨진 고통은 어떻게 될까? 고통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아.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어느 순간 말이야...

...

...

“쿵”하고 다시 나타난단 말이지.

그 순간은 고통받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야.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가 없어.

후자의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고통을 타자에게 전이시킬 수 없어.

왜냐고?

연진아-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아파.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든. 숨을 쉬고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말이야.

타자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너무나 아프거든. 그 고통을 알고 있으니까 고통을 주는 순간 ‘내’가 너무 아프거든. 아니 죽을 것 같거든 인가.     

하지만 연진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어느 순간 말이야...

...

...


“쿵”

"쿵"

"쿵"

...

"쿵" 하고 다시 나타난다니까.

그래서 후자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고통으로 전이하는 전자의 방식을 택하지 않아.

자멸하거나 승화를 시켜.


하지만 연진아-

그거 아니? 자멸 역시 사실은 고통을 되갚는 방식으로의 전이라는 걸.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승화를 선택해.

그들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지인거지. 성공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흥행수익? 영화제 수상? 명예?

훗- 연진아-

그들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 고통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알리되, 고통 그대로가 아닌 고통의 이미지로 만드는 작업.

말했잖아. 그들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또는 전이의 방식으로 핏빛(고통)의 복수를 할 수 없다고. 그러면 너무 아프다고. 아니 죽는다고.      


연진아-

고통을, 폭력을 유희로 는 연진아-

그러니까 어쩌면 너는 절대 이해를 못 할지도 몰라 연진아.

제시카는 에르난의 기억, 전생의 기억의 고통에도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후자의 인물이기에 고통을 소리로 기록하고 싶어 하고, 아핏차퐁은 그런 제시카와 에르난과 죄를 짓지 않는 자연을 만들어내어 이 모든 폭력과 질병의 매스미디어의 역사를 승화시키려 하는 이유를 말이야.

후대(우주선)에 또는 타자에게 ‘나’, ‘우리’, ‘인류’에 대한 기록을 전할 때 고통의 역사, 인류의 폭력과 질병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건 죽음이라는 걸 말이야.

제시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거와 미래의 혼재된 시간에 머무르는 것처럼(에르난은 녹음실에 없다, 치과의사는 작년에 죽었다, 에르난의 전생을 기억한다), 고통(“쿵”)의 원형을 간직한 것처럼, 타자의 고통을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가 폭력을 유희로 고통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을 말이야.      


혹시 그거 아니 연진아-

베르테르 효과. 아니면 핀라드와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에서 자살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살에 대한 상황과 방식을 여과시켜 보도하자 자살률이 줄었다는 거.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기록 한 후,  후대에게 전달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생길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폭력과 질병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면 후자를 택하는 게 인류를 위해 더 나은 방식이 아닐까?

     

그러니 기대해 연진아-

아피찻퐁을, 아피찻퐁의 후대를.



#메모리아 #아피찻퐁위라세타쿤 #영화리뷰 #영화비평


---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 이번주 녹음영화입니다. 질문 있으신 분들은 아래 댓글에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정하여 방송에서 패널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탑> (2022, 홍상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