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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킬 홍은화 May 20. 2023

경마장 가는 길

- 현재를 살아가는 재희, 과거에 스스로를 옭아 맨 R


R(문성근)은 유부남이었지만 J(강수연)와 프랑스에서 동거를 했다. 하지만 그는 자녀와 시부모를 부양하고 있는 아내(김보연)나, 성적 욕구해소의 도구로 이용하는 J에게-그는 당당하게 J를 사랑하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심지어 J에게 임신중절을 요구한 이력이 있다- 미안한 감정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아내에게는 자신과 이혼해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J에게는 논문을 써준 대가로 3천만원 또는 그에 상응하는 섹스-이미 프랑스에서 3년간이나 그 대가를 받았음에도-를 요구한다. 비윤리적 태도로 구토 유발의 서사를 이끄는 것은 R. 궤변의 향연이 스크린 가득 펼쳐진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도리를 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R의 가치에 실존, 부조리, 포스트 모더니즘 따위를 끌어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철학자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R이 프랑스에 있었을 때와 달리 한국에서 이 여성들은 R의 궤변에 대항한다. 아내는 R의 시댁식구들에게 보복할 것을 선언하고 J는 R의 폭력이 관계의 끝임을 공표한다(J는 자신과 R의 상황을 지인과 부모에게 알린다. J의 부모는 돈을 R이 아닌 R의 아버지에게 전달함으로써 R의 협박을 완전히 차단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J’가 (자막에 J로 표기 되기는 하지만) 디제시스 내에서 R과 달리 후반부에 이르러 ‘정재희’로 명확히 한국이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R이 펼쳐 본 문예지에 ‘정재희’이름이 선명하게 클로즈업 되는데 이는 J가 더 이상 R처럼 영문 알파벳 하나로 호명되기를 거부함으로써, 프랑스에서 공유한 가치관과 철학 노선을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게 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서사의 절정에 이르러 R은 ‘재희’를 걱정하며 거짓(문학비평 능력)으로 어찌 살아 갈 거냐며 비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울컥한 반응을 보이는데 영화는 그러한 R을 마음껏 비웃으라는 건지 울어달라는 건지, 바로 뒤 시퀀스에서 형편없는 R의 상황을 보여준다. R은 여전히 무직이고 R의 아버지는 각혈로 대학병원 입원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R은 하릴없이 (소설을 써야만 한다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사랑이 아니라고 했으니,) 오직 섹스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R은 궤변론자를 넘어서, 모두가 기피해야 할 중증 나르시시스트이며, 의미 박탈자- 타자의 견해는 모두 틀렸다며 타자가 지닌 견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박탈하는 사람들-다.


이렇듯 서사를 떼어내 보면, 즉 원작과 시나리오를 쓴 하일지는 (한국 남성들에 대한 자조인지 비판일지 위무일지 모를) 허위에 찬 지식인들에 대해 각성을 촉구하고 경고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만일 R에 대한 일말의 연민을 느끼기를 바란 것이었다면 참으로 역겹고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비윤리적 행태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장선우 감독은 그것을 스크린에 담아 재현하는 과정에서(데쿠파주에서) 가학적 선정성으로 여성주체 서사의 메시지들을 훼손시키는데, 표독스러운 여배우들의 연기를 통해(김보연이 저주의 말을 퍼부을 때, 강수연이 관계의 종말을 선언할 때) 여성주체들을 비웃고자 한 것인지, 경외심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R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프랑스에서 그러했듯이 자신의 욕망-재희에게 자신의 성적욕구를 해결하고, 자신의 가족부양을 회피하고 아내에게 떠맡기는 것-을 채우려하나 그것이 실패하자, 다시 프랑스로 가려고 한다. 아니 프랑스가 아닌 과거로 가려한다. 어쩌면 미래를 과거처럼 만들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달리 여성들은 과거를 인정하고(김보연과 강수연은 과거를 모두 드러낸다) 미래를 설계하며 정확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그의 욕망은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과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므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재희와 아내(그리고 그의 엄마와 여동생), 과거에 스스로를 옭아 맨 R.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에 두 번 등장하는 보이스 오버 “그는 6월 16일에 도착했다고 한다. 잠시 후 그는 어쩌면 6월 15일 또는 17일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는 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 영화비평 전문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크리틱] 5월 21일 녹음은 <경마장 가는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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