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에 대한 단상

영화, 어트랙션, 이미지-아트

by 지킬 홍은화

일이 있어, 오래된 외장하드를 검색하다 당시에 기록한 영화 글을 발견했다.

지금은 사라진 네오이마주,라는 영화웹진에 게재했던 글이다.

벌써 15년이 넘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다시 읽기가 두려웠지만 읽어보니 투박해도 나름 재미가 있어 그대로 올려본다.

이 글 전에, <아바타>가 개봉하자마자 '어트랙션'을 키워드로 (영화가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느낌이어서) 글을 썼더랬다. 그 글 역시 게재되었었는데 어디 있는지 못 찾겠다. 혹시라도 추후에 찾게 되면 올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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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에 대한 단상

- 영화, 어트랙션, 이미지-아트


1.1 <열대병>과 <징후와 세기>

‘미래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과 <징후와 세기>는 지금껏 관객이 영화역사에서 접해온 스토리텔링 서사형식을 지워낸다. 영화의 발화가 극단적 양식들로 생성되곤 했지만 내가 접한 이 두 편의 영화는 그 극단을 뛰어넘는다.

<열대병>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켕은 켕인가, 유령인가, (호랑이) 유령이 들어갔던 통인가, 여러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무당이 통으로 변한 후 켕으로 변한 것인가,라는 의문에 답할 수 없으며 실은 이러한 질문이 유효한 것인가 혹은 이러한 질문은 모두 무의미한 것인가,에 대하여 단정 지을 수 없는 서사-만일 그것을 서사라 불러도 좋다면-를 지닌다.

<징후와 세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군의가 면접을 보는 두 개의 차원은 시간의 흐름인가(군의의 애인은 두 번째 보여주는 차원에서 건설현장을 보여주며 자신이 있게 될 그곳의 병원으로 전근 와 주길 기대한다. 다시 말해 군의의 세 번째 면접, 전근의 예고를 뜻하는 것인가), 동시간대에 이루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인가,에 대하여 확답할 수 없는 서사를 지닌다.

두 영화 모두 영화 안에서 극명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되지만 서사적 연결 고리는 지극히 미미하다. <징후와 세기>에서는 아예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차원을 병렬시켜 놓은 것만 같아서 <열대병>의 서사 읽기보다 더 강력한 공시성과 통시성을 공존시킨다. 예컨대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사운드로만 몽타주 되는 달리 숏을 통해 인물들과 동시간에 공존한 병원 밖 풍경 속 자연이라는 공시성과 두 의사-이제는 군의가 아닐지도 모르는 전반부의 군의-를 따라가는 달리 숏이 있는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사랑을 고백받은 여의사가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던 것과 역으로 의사의 사랑에 관한 미래를 진행시키는 통시성을 지닌다. 게다가 <열대병>과 <징후와 세기> 두 영화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만남이 존재한다. 그것이 미장센이든 배우든 대사든지 간에. 그 과정에서 관객 중 어떤 이들은 융의 집단적 무의식 원형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그들의 시간 속에서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고 그들의 시간과 자신들의 시간에 포개어 직접 데자뷔를 경험하기도 한다.


감독은 두 영화 속의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것의 만남을 통해 시대성을 지원 낸 자연과 문명을 선과 악 혹은 더 나은 상황에 대하여 판단을 유보시키고, 관객은 새로운 혹은 이미 존재했으나 외면해 왔던 영화 문법을 만나게 된다. <열대병>에서 통의 행동들은 마치 인간을 학습하는 양태를 띤다. 통이 차에서 한 여자와 눈을 마주칠 때 그녀를 따라 훔쳐보거나 웃는 모습이나, 글을 모르던 그가 켕이 준 쪽지의 글씨를 따라 쓰고 맞는지 확인할 때나, 켕이 손에 하는 애무를 따라 할 때 등이 그러한데 이는 처음부터 학습의 의미로 기호전달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서 통의 모습을 한 유령, 혹은 신체가 지닌 기억에 의존해 살아가는 무당의 혼을 지닌 통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성되는 순간 역으로 유추해 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신체가 기억하는 사적 무의식과 신화가 지닌 집단적 무의식을 소환해야만 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혼재시키는 데자뷔 같은 환영을 재현하는가?

스님이 수도 없이 기도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닭 이야기와 조류 배아에 악영향을 끼친 나아가 식물과 땅속에 흡수되어 내분비계교란을 일으키는 DDT가 무엇의 약어인지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군의의 면접은 DDT가 세계에 가장 폭넓게 확산된 1940~1960년경 군부 쿠데타로 얼룩진 타이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열대병> 속 통의 학습결과에 ‘군복 입으면 취직 잘 됨’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때문에 『씨네 21』아핏차퐁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열대병>과 <징후와 세기>가 사랑이나 기억에 의한 질병이다’라고 한 대답은 봉준호 감독이 <괴물>의 모티브를 ‘중학교 때 버스 안에서 보았던 한강의 괴생물체에서 얻었다’라고 이야기한 만큼이나 정치성을 지닌다.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의 중학교 때인 1980년대 초 봉준호 감독이 당시 한국에서 괴생물체의 형상을 만날 수, 혹은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처럼 아핏차퐁이 사랑이나 기억에 의한 질병을 그리면서 집단 무의식을 소환하고 데자뷔를 생성해야만 했던 까닭. <마더>의 시간성이 지워진 것처럼, 공시적이며 통시적인 역사성이 <열대병>과 <징후와 세기> 각각의 영화 속에서 그리고 두 영화 사이에서 공존해야 하는 까닭.

스님의 권고대로 차를 마시고, 치아와 관련된 노래를 들으며 치료를 받았던 전반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대신 스님의 권고를 무시하고 노래는커녕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치과 치료가 존재하는 후반부에서 그래도 의수를 통해 걸을 수 있게 된 인물을 마주할 때, 두 차원의 세계 혹은 세기(century)중 어느 것이 옳다고 선택할 수 없을 때, 발병하는 징후(syndrome)를 억압하거나 치유하려는 에어로빅은 <마더>에서 엄마가 기억을 간직하거나 지워 내야 하는 고통 속에 침을 놓는 행위와 유사한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내가 서사라 불러도 좋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의 근원지가 되는 독특한 이미지는 위의 텍스트를 유예시키는 힘을 지닌다. <열대병>에서 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불빛들의 이미지. <징후와 세기>의 대사에 언급된 투명한 원 이미지. 그리고 습한 기운이 엄습해 오는 <열대병>의 이미지들과 아름다운 휴양지를 연상케 하고 쾌적한 도시적 이미지를 고스란히 향유하게 하는 <징후와 세기>의 이미지들.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수많은 숏들의 이미지들.

1.2 ‘영화 속’ 혹은 ‘영화와’ 어트랙션과 이미지-아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3D의 등장 이상으로 <열대병>, <징후의 세기>(그리고 아마도 내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의 등장은 영화에 대한 재정의를 욕망하는 것일까?

나는 위의 영화들이 영화에서 분리되거나 흡수될 가능성들을 생각해 본다. 토킹영화가 극단으로 치달을 무렵 뮤지컬이 영화에 도입되었으며, 오랜 시간 영화시장에서 호황을 누렸다. 현재 뮤지컬은 영화라는 정의에서 단지 하나의 장르로 귀속되었으며, 관객은 초창기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신기한 호기심으로 사운드에 과도한 애정과 찬사 혹은 야유와 질타를 보내지는 않고 있다. 물론, 예외적으로 민족적 정서에 따라 여전히 그것이 유효한 나라들도 있지만. <아바타> 이전에 4D 어트랙션은 존재했고 제임스 카메론은 그것을 영화에 도입하였다. 토킹시대의 도래 때, 극장주들이 사운드 시스템 설치비와 이익창출의 손익계산서에 머뭇거리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좌석교체와 더 나은 3D 해상도를 위한 스크린 시스템 설치비 손익계산서 앞에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설치비가 비교적 저렴한 소규모 어트랙션이 곳곳에 생겨났고, 어떤 사람들은 <아바타>를 관람했을 때 느꼈던 고역이나 부작용들을 피해, 4D를 단돈 3000원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바타>는 4D라는 어트랙션의 촉매제가 된 셈이다.

나는 아핏차퐁의 영화 역시 비슷한 상업논리에 유입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게 그의 영화들은 굳이 명명하자면 이미지-아트에 가까웠다. 미장센에서 확장된 운동성-필름의 영사나 파일의 로드(load)가 갖는 시간·운동성과 스크린 속 사물의 운동성 모두를 포함한-을 갖는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미술작품 이상으로 관객의 강렬한 감성과 사유를 요하면서도 과거 탄생배경에 얽매일 수 있는 비디오·미디어 아트와는 구별되는 이미지-아트. 영화와 미술 사이에 놓인 예술. 『씨네 21』 767호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이미 대만 출신의 차이밍량은 자신의 영화를 미술품처럼 소장가치로 인정받길 원해 <얼굴>의 DVD 발매를 포기하고 35mm 프린트와 갤러리 등 공공영역에서의 상영권리를 단 10명에게만 판매한다고 했다. 처음 그 기사를 읽었을 때는 신선했다. 그러나 아핏차퐁의 두 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난 뒤 떠오른 그 기사는 나 같이 가난한 관객에게 그리 희소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그 기사를 꺼내 읽을 때, 나는 장선우 감독의 <장선우 변주곡> 속에서 이루어진 인터뷰 중 노점상 아주머니의 대답이 오버랩으로 읽혔다. ‘장선우 영화감독을 아시나요?’, ‘몰라요. 먹고살기 바빠서 영화 잘 못 봐요’ 그것은 장선우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의 메시지에 비추어 아이러니하면서도 가장 그 메시지에 부합하는 인터뷰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핏차퐁의 영화에서 원시성과 자연을 읽어낸다. 아니, 이미지-아트에 매료된다. 이미지-아트가 숨 쉴 수 있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차이밍량이 발견한 것처럼, 문명의 극점에 있는 갤러리다. 이때, 나는 <열차의 도착>이 상영되었을 프랑스의 한 카페를 생각한다. 파리 명사들의 사교 장소였던 그랑카페를 상상한다. 그리고 에디슨이 가질 수 없었던, 뤼미에르 형제가 획득한 지금까지 이어져온 정의의 ‘영화’를 관람하는 첫 관객층을 생각한다. <엉클 분미>의 개봉소식 앞에 ‘지방에서도 하냐’는 초라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나 자신을 생각한다.

3D가 어트랙션으로 유입되고 아핏차퐁의 영화들이 이미지-아트가 되어 영화에서 분리될 것인가, 아니면 영화의 미래가 되어 영화의 재정의를 획득할 것인가, 혹은 처음 영화라는 정의를 획득한 그때로 회귀할 것인가, 란 문제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바라보는 것뿐이다. 어쩌면 관객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참조>

* 김호영 「원시 언어 혹은 보편 언어로서의 영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을 중심으로-」

* 『씨네 21』no.769 'feature' p.85, no.761 '김지석의 Cinema now' p.108

* 박영석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공간, 인간, 기억」 http://neoimages.co.kr/news/view/2631

* 『NEXTplus』'정성일의 이 장면 심금을 울리는구나! 접속의 영화, <열대병>과 <징후의 세기>‘ http://php.chol.com/~dorati/web/nextplus/nextplus_02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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