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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Feb 04. 2021

시간 앞에 선 인간, <더 디그>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한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갔었던 경주는 둥그런 언덕 같이 생긴 무덤 천지였다. 거기서 살던 동네 꼬마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무덤을 오르내리기도 했었고, 가끔씩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맨 위쪽에 꽂아두기도 하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경주에서 오래 살았던 카페 주인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지금처럼 신라 유적지의 분위기가 아닌 그냥 '마을 뒤쪽 언덕 1' 느낌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곳을 오르내리기도 했었고 심지어 자전거까지 거기에다가 매어두었다고 한다. 지금 그랬으면 SNS에 올라갈 일이지만.



오늘 소개할 영화 '더 디그(the DIG) 역시 영국에 있는 아주 오래된 무덤 유적과 그것을 발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리고 시대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존 프레스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올해 처음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하기 시작했으며,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볼드모트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을 연기했던 배우 레이프 파인스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뷰캐넌을 연기했던 케리 멀리건이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물론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주인공의 여자 친구로 연기했던 릴리 제임스도 있다.




영화 속 배경이었던 서튼 후(Sutton Hoo)


영화는 고고학자였던 배질 브라운(레이프 파인스)이 이디스 프리티(케리 멀리건)의 의뢰를 받아 그녀의 저택 뒤편에 있던 서튼 후의 작은 언덕들을 조사하는 장면과 함께 시작한다. 사실 이 지역은 6세기에서 7세기 사이 영국에 살았던 앵글로색슨 족의 유물이 많이 출토된 지역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배질 브라운은 그가 파기로 결정한 어느 언덕에서 온전히 보존된 앵글로색슨의 배 무덤 한 기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에 관심이 없던 브라운의 동료들과 입스위치 박물관뿐만 아니라 대영 박물관까지 끌여들이게 되고, 유명한 고고학자 찰스 필립스(켄 스탓)까지 참여하여 배질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배질 브라운이 처음 이 지역을 찾았던 1939년은 영국과 독일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하여 인접한 폴란드를 침공했고, 영국은 끊임없이 외교적 수단을 통해 전쟁을 피해 가려고 시도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내내 서튼 후의 하늘은 영국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끊임없이 날아다니며 전쟁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이디스 프리티의 사촌인 로리 로맥스(자니 플린) 역시 영장을 받아 공군에 입대한다. 그는 이디스의 요청을 받아 발굴 현장을 찍는 일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발굴 지원을 나온 페기(릴리 제임스)와 눈이 맞아서 그녀의 남편인 스튜어트(벤 채플린)의 눈을 피해 로맨스를 이어간다.



미망인이자 시한부 인생이었던 이디스에게는 아들 로버트가 있었다. 그녀는 과거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고, 이제 병으로 자신까지 세상을 뜨게 되면 남겨질 아들을 걱정했다. 모든 인간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잃는 것처럼 그녀 역시 악화되어가는 병세에 신음하고, 로버트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배질 앞에서 눈물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발굴은 진행되어야만 한다. 그곳에서 나타난 앵글로색슨의 배 무덤과 출토된 유물들은 몇 세기를 뛰어 넘어서 그들 앞에 등장했고, 배는 비록 풍화되었지만 온전한 형태로 사그라들었던 자신의 역사를 다시 세상에 내보였다.


죽음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 우리 행적의 자취는 역사로서 후대에 본보기로 남는다


배질 브라운의 대사는 사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다. 발굴은, 그의 말마따나,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일이며 후대에 그들의 뿌리를 알려주는 일이다. 곧 시작될 전쟁보다 더 길이 남을 일이니 현장에서 나온 배질에게 그녀의 아내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이디스 역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삶까지 싸우려는 의지를 불태우고자 어떻게든 현장에 머무른다. 어쩌면 그녀의 죽음이나 앵글로색슨의 풍화된 배는 모두 같은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질 운명은 인간이나 배나 똑같지만, 그들의 자취는 어떻게든 후대로 이어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배질 브라운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튼 후의 유적은 이디스가 세상을 떠난 후 9년이 지나서야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지만 당시 배질 브라운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최근에서야 비로소 고고학계에 대한 그의 공이 인정되어 대영 박물관에 그와 이디스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로 각색되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고, 아직도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은 이름과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게 만들었다. 당시 실제 발굴 현장의 사진을 보면 새로운 발견에 대한 사람들의 흥분감이나 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느끼는 묘한 감동은 어쩌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각색물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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