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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Feb 10. 2021

혼자 전시회에 가고 싶은 날이 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방문기

덕수궁 안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요새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 삶을 살았다. 원래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이제는 학교에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가 다들 코로나에 추위에 귀찮다고 밖에 나가지 않는 친구들이 반 이상이었기에 나 역시 집에 틀혀박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번에 받은 아이패드 미니 덕분에 그 시간을 오롯이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채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잠깐 헬스장에 들려서 운동을 했고, 날씨가 따뜻하면 마스크를 쓰고 동네 주변을 산책했다. 사실 친구들은 다 고학년이라 취업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이미 직장인이라, 이제 2학년에 올라가는 나만이 백수답게 열심히 놀고 있었다.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얼마 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합격했어,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가. 자소서를 첨삭해줬던 친구가 취업 소식을 전해주었다. 며칠 후 다른 친구는 더 좋은 학교로 편입에 성공했다는 말과 함께 술을 샀다. 지난해는 다들 열심히 살았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과 경험을 마주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작년을 떠올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숨었다. 하지만 이건 변명일 수도 있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환하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이미 서로 다들 번호를 교환했다는 학교 사람들의 글도 커뮤니티에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급함과 열등감. 두 가지 감정은 언제나 나를 앞으로 떠밀거나 뒤로 끌어당겼는데, 이번에는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덕수궁은 생각보다 멀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석계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1호선을 타고 시청역까지 가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영하의 날씨였던 서울은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운 날씨면 미세먼지가 거의 없었고, 그렇지 않으면 공기가 탁했다. 문제는 더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이제는 미술관이 전부 예약을 받아 운영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나는 못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이런 경우가 있나. 나는 덕수궁만 보고 가게 생겼던 것이다. 분명히 인터넷에서 본 홈페이지는 예약 버튼이 없었는데. 안내를 받고 나서 다시 본 홈페이지에서는 대문짝만 하게 버튼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미술관 근처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 덕수궁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집에 가야 하나. 내 모습을 보셨던 뒷 줄의 어느 친절하신 분이 자리가 남았을 수도 있다면서 자신의 예약 창을 보여주셨으나 헛수고였다. 그분은 미안하다면서 연신 인사를 하시곤 자리를 뜨셨고, 나도 계속 괜찮다며 고개를 숙이며 다시 벤치로 갔다.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줄지어 미술관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남는 자리가 언제쯤 있는지 찾아봤다. 오후 4시. 4시간 동안 추위에 떨 수는 없다는 생각과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나의 직진 본능을 일깨웠다. 나는 곧바로 미술관 창구에 들어가서 물었다. 예약을 못했는데 혹시 남는 자리 있으면 들어가도 될까요? 기적적으로, 곧바로 들여보내 주셨다. 이걸 보진 않으시겠지만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점기 말에 활동했던 우리나라의 소설가와 시인, 그리고 화가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그 역사를 그들의 작품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주제였다. 실제로 '날개'를 쓴 이상은 경성에서 작은 찻집을 열고 예술가들과 함께 그곳에서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고 한다.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함께 술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던 것처럼, 경성 역시 한국의 '에꼴 드 파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상, 김기림, 박태원 같은 문인의 초판 소설과 시집을 볼 수 있었고, 구본웅, 김환기, 길진섭 같은 화가들의 유화와 판화 등도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김환기의 작품과 윤동주의 유고 시집 초판본을 모두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나는 이상이 경성의 어느 찻집에서 다른 화가, 작가들과 함께 프랑스 영화를 보고 삽화를 그리고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원래 건축을 전공했던 인재였다. 그가 하던 모든 예술보다는, 출세했다고 인정받을 만한 직업인 건축이나 공무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글과 그림을 선택했고,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글을 쓰다가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폐병에 걸려 요절했다. 나타샤를 사랑한 백석의 시나 일본에 유학했던 조선 학생들의 사진, 화가들의 편지도 눈에 띄었지만 이상은 그중에서도 가장 빛났다.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였던 그가 바라본 조선의 말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조선의 자연은 왜 이리도 슬플까, 라는 의문을 남긴 이태준의 소설 '패강랭'이 아마 이상의 시선과 같지 않았을까.



전시를 다 보고 나와서 본 덕수궁은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정해져 있던 관람 시간이 종료되자 나오는 사람들로 분수 앞은 붐볐지만 다들 곧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바로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지만 왠지 여운이 남아 쉽게 정문을 나설 수 없었다.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모든 인물들은 다 과거로 가고 싶어 한다. 현재는 1930년의 파리로, 그 과거의 인물들은 다시 1870년으로, 또 르네상스로. 경성 찻집 속의 그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김기림이나 이여성 같은 사람들은 조선의 전통이라는 멋을 위해 과거를 쫓는 듯 보였고(비록 나만의 생각이지만), 이태준과 김용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미래를 향하는 가치 있는 창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일 줄 알았고, 다른 이들과 달리 다음 세대에게 질문을 던질 줄 알았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정문 앞을 나서자 곧바로 시청이 보였다. 왼쪽으로 돌아보면 광화문이 보였고, 직진을 하면 숭례문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시청을 지나 인사동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떤 기자가 시청 앞 광장에서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선별 진료소 앞으로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 옆에 있는 무교동 골목에서 밥을 먹고 다시 청진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어차피 어떻게든 아등바등 밥을 벌어먹고 살 내가 예술을 필두로 삶을 살았던 이들의 질문을 받아낼 여력도, 깜냥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순간의 치기라고 남이나 내가 스스로를 몰아세운다고 하더라도 점점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태에서 나는 쉽게 웃어넘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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