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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Aug 29. 2021

쓰지 않는 저녁

 

   1. 브런치를 잠시 내려둔지 거진 5개월이 다 되어간다. 용돈 벌이를 해보겠다고 자기소개서 첨삭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화근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하고 있어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그렇다고 해서 독서를 손에서 놓거나 글쓰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운동을 매일 해야 근육도 뭉치는 것이 덜한 것처럼, 나는 이곳에 글을 쓰지 않았어도 뭔갈 매일 쓰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첨삭을 진행하다 보니 이른바 '글지구력'이라는, 오랫동안 키보드에 손을 놀려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기술을 갈고닦은 셈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달리기도 제대로 못하는 체력이 되었지만.


    2.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동남아 국가들에서나 경험할 법한 더위와 습기가 내 방을 가득 메웠고, 그래서 나는 그동안 지리멸렬하게 끌고 오던 베트남이나 태국 여행에 대한 근거 없는 낭만이나 희망을 이번에 깔끔히 접을 수 있었다. 아무리 동네 팟타이와 쌀국수를 먹을 때마다 그들의 고향에서 느낄 수 있는 향과 맛이 간절해져도, 그것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한여름의 살인적이고도 음습한 동남아 날씨를 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지난 몇 개월 간 나는 동네의 카페란 카페는 이 잡듯이 뒤지며 가장 시원하고도 쾌적한 공간을 발굴해냈고, 그 결과는 도장으로 가득한 몇 장의 카페 쿠폰과 참을 수 없는 지갑의 가벼움, 그리고 카페인 중독으로 이어졌다.


    3. 이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새벽은 언제나 어스름이 조금 가셨지만 여전히 어두웠고, 그래서 자주 걸었다. 예전에 나는 산책이 잡생각을 정리하거나, 길게 끌고 가던 크고 작은 고민들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오히려 반대다. 모두에게 각자의 산책의 정의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이 산책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동네를 돌면서 고민이 말끔히 정리됐던 적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멍하게 걸었던 일만 많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순간을 회상하는 일도 있었다. 너무 많이 떠들어서, 혹은 너무 조용하게 입만 닫고 있어서 부끄러웠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다시 부끄러웠다. 예전에는 아는 것이 나오면 갑자기 막 떠들기 시작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어느 순간 내 모습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물론 너무 웅크리고 있어도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4. 문득 내 글을, 내 생각을 이렇게 적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인생을 요약해서 글로 쓰는 자소서 첨삭에서 벗어나, 이렇게 나를 되돌아보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너무 많은 타인의 이야기가 내게 쏟아지는 삶에서 중심을 잡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 글쓰기가 이런 면에서는 정말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내밀한 구석이 내게 들려오는 것은 아직도 무섭다. 스스로 흔들리는 것을 붙잡기에도 숨이 가쁜 수많은 '나'가 이젠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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