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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Jan 26. 2022

'선'을 넘은 작가들

금기와 위반의 글쓰기는 문학에 기여했는가

  성에 대한 금기와 위반의 글쓰기가 과연 문학에 이바지한 바가 있는지를 대답하기 전에, 모든 독자는 먼저 문학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현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문학은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한 형태이다. 그래서 문학 작품은 그것을 읽는 다양한 계층의 독자에게 정서적 반응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작품 속으로 그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이때 작품과 정서적 교감을 나눈 독자는 문학의 공리성이나 오락성에 대해 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문학이 대중에게 올바르고 선한 것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오락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어졌다. 그러나 쾌락은 절대 아름다움의 동의어가 아니며, 청교도적인 덕목으로 이루어진 톨스토이의 세계 역시 복고주의적 태도에 불과하다. 결국,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나 착함이나 진실함의 어느 한 편을 쥐고 그것만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움이며 착함이며 진실한 것이냐를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의 연관 아래서 명백하게 밝히려고 애를 쓰는 일이다. 그리고 금기와 문학의 충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모든 사회는 자기 나름의 금기(禁忌) 체계를 가진다. 금기는 원칙적으로 인간의 쾌락 본능을 억압하는 수단이기에, 당연히 금기가 적은 사회일수록 억압된 무의식은 더 많이 승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승화된 무의식의 분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취하도록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회는 특유의 금기 체계를 형성했고, 이는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예민한 관찰력과 섬세한 신경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도전받았다.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여성 운동이 있을 것이다. 여성의 참정권, 욕망, 그리고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운동가나 작가들은 한때 주류 사회로부터 비난받았지만, 현재는 사람들의 의식 변화로 인해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특정 사회의 윤리나 도덕이 문제시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풍속과 금기 체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 대상이 되는 ‘윤리’라는 것은 주로 인간이 가져야 할 최상의 상태를 미리 설정해 놓고, 그것을 향하도록 하는 일종의 ‘신앙’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활동은 마치 함수의 극한과도 같아서, 인간은 가까워질 수는 있으나 도달할 수 없는 도덕의 이상을 보고 입맛만 다시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산해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는 최대한 정직하게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금지하는 제도를 관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탄생한 위반의 글쓰기는 독자가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고, 사회 구조를 이루는 특정 도덕이 과연 그것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인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가는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금기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대표적으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주인공인 채털리 부인은 사냥터 지기와의 불륜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낸 로렌스의 ‘건강한 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에 독자는 처음으로 당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건강한 자기 정체성 형성과 새롭고 건전한 문명을 위한 성과 육체 해방의 필요성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또, 조르주 바타유는 ‘눈 이야기’를 통해 노동과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에로티즘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마주하고, 기계 부품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환기했다. 물론 그의 에로티즘 담론은 추상화로 귀결될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이나 비현실적인 대안으로 인해 공격받았다. 그러나 바타유의 글쓰기는 사람들이 ‘선’ 혹은 ‘정상’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굴복과 복종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다. ‘나’와 시몬, 마르셀, 그리고 에드먼드 경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볼 수 있었던 세 가지의 ‘눈’ 이야기는 성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포르노그래피로 변모하여 독자를 둘러싼 사회의 금기를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역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문제를 도발적인 내용으로 파헤치고 있다. 자식을 남편의 대체물로 다루고자 각종 억압과 통제를 행사하는 어머니, 그 과정에서 왜곡된 성적 정체성과 욕망을 갖게 된 딸의 모습은 그 자체로 현대 사회에서의 사랑과 소통,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은유이다.


  이처럼 수많은 작가가 세상에 내보낸 금기와 위반의 작품은 당대의 사회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의 총체성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가 진행 중인 ‘젠더’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주제는 그동안 한국 사회의 윤리나 금기에 의문점을 제기한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촉발된 결과물이다. 세계는 언제나 정반합의 논리와 함께 나아간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오늘날의 ’합‘은 바로 그동안 쉬쉬했던 여성 인권 문제와 동물권, 동성애 같은 주제의 주류화일 것이다. 당장 문학 시장이 과거보다 이러한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들의 비중을 많이 가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주제는 그동안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서 수면 밑에서만 다뤄졌지만, 현재는 다양한 문학 작품이나 오프라인 활동을 통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성에 대한 금기와 위반의 글쓰기가 한국 사회에, 그리고 한국 문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런 ’합‘은 다시 새로운 ’반‘의 도전을 받고 있다. PC나 여권 상승 운동이 여성 우월주의와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비판과 함께 그동안 외면받았던 남성 인권이나 포스트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금기와 위반을 다루는 문학은 바로 이 시점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현대 사회의 금기는 통신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이전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형성되거나 파괴되고 있다. 성에 대한 금기와 위반의 글쓰기 역시 형식과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각종 온라인 공간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미 과거에도 금기를 다룬 주제가 문학과 세상을 바꾼 것처럼, 이런 글들은 앞으로 문학 작품의 등장을 촉발할 아이디어나 현실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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