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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눈동자(1)

by 주이슬 Mar 19. 2025

그날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잠에서 깬 린델이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섰다. 하델은 어디로 갔는지 집안 곳곳을 둘러봐도 보이질 않았고, 대신 가린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가린, 하델은요?”

“일어났니? 하델은 고운을 데리러 갔어.”

“왜요?”

“오늘 마니네 아이가 태어날 것 같거든. 고운이 축복을 해 줘야 해. 엄마도 곧 도와주러 갈 거야.”

“저도 돕고 싶어요.”

가린이 검지로 린델의 코를 가볍게 톡 쳤다.

“넌 유나네 집에 가 있으렴.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데리러 갈게.”

그렇게 린델은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인 채로 유나네 집을 향해야 했다. 유나는 린델보다 겨우 두 살 많았지만, 또래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인 데다 꼬리가 상당히 탄탄해서 힘이 아주 셌다. 그래서인지 당차고 겁 없는 활달한 성격을 지녔고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걸 좋아했다. 그에 비해 조용한 편인 린델은 유나가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유나네 집은 숲의 초입에 있어서 둘은 나나의 허락하에 잔물결나무 군락지로 가 시간을 보냈다. 숲길 안으로 들어가 2분 정도 걷다 보면 나오는 곳이었는데, 여기서 작고 동글동글한 열매를 실컷 따먹을 수 있었다. 열매는 노란빛에 가까운 연두색을 띠었고 베어 물면 강한 신맛과 은은한 단맛이 났다. 많이 먹으면 한동안 혀에 약한 경련이 일어서 잔물결 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나는 배부름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열 알 정도를 해치우더니, 배를 통통 두드리며 길게 자란 풀 위로 털썩 누웠다.

“혀가 찡해.”

“네가 많이 먹어서 그래. 난 세 개만 먹어서 괜찮은데.”

“알거든?”

유나가 새초롬하게 받아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아직 손에 쥐고 있던 열매 세 알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집에 가서 먹게?”

“아니, 지유가 마니를 도와주러 갔어.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지유 하나, 마니 하나, 아기 하나 줄 거야.”

그 말을 듣던 린델도 본인의 바지 주머니에 열매를 한 줌 집어넣었다.

“아기 이름은 정했대?”

“니안으로 할 거래.”

아기 이름을 듣자마자 유나가 까르르 웃었다. 린델도 미소 지었다.

“웃긴 이름이다.”

“응. 애들이 놀리면 어쩌지?”

“걱정하지 마. 네가 마니네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니까, 잘 지켜보다가 애들이 놀리면 나한테 다 말해. 바로 혼내줄게.”

유나는 다시 풀 위로 털썩 누웠다. 린델은 유나의 정의로운 성격이 좋았다. 유나는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괴롭히지 않았고 오히려 약한 친구들의 편에 섰다. 숲속에 살고 있는 작은 동물과 곤충을 사랑했다. 린델은 본인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면 듬직한 유나가 지켜줄 거란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아니, 믿음까지 갈 일도 아니었다. 당연한 거였다.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안 아프냐? 너도 여기 와서 같이 눕자. 엄청 푹신푹신해.”

린델은 유나 쪽으로 다가갔다. 린델의 발걸음에 맞춰 풀이 누우며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다섯 걸음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인데 유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으려니 억만겁처럼 느껴졌다. 린델이 곁으로 겨우 다가가자, 유나가 몸을 옆으로 살짝 비낀 다음 린델이 누워도 충분할 공간을 만들었다. 린델은 쉽게 눕지 못하고, 한동안 쪼그려 앉아 있다가 다리가 곧 저릿해져서 유나를 따라 뒤로 털썩 누웠다. 풀이 귓가와 얼굴을 간지럽혔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눈이 부셨다. 린델은 유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나는 햇빛과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햇살을 잔뜩 받은 유나의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검게 빛났다. 린델은 지금 본인의 눈동자는 무슨 색일지 궁금해졌다. 햇빛 때문에 시시한 갈색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유나처럼, 가린처럼, 토타처럼 짙은 검은색이었으면.

“유나.”

유나가 린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상큼한 잔물결 열매 향이 훅 끼쳤다.

“지금 내 눈동자 무슨 색이야?”

린델은 햇빛이 눈가에 닿지 않도록 슬쩍 피하며 물었다. 유나가 몸을 반쯤 일으켜 린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구우… 구우….” 새가 낮은 목소리로 울었다. 린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유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주……. 밝은 갈색.”

린델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축 처진 마음을 감췄다.

“알려줘서 고마워.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유나는 린델의 눈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다시금 입을 뗐다.

“되게 예뻐.”

쏴아 바람이 불면서 유나의 윤기 나는 머리가 흩날렸다. 짓이겨진 풀의 풋내가 함께 실려 린델의 코에 가 닿았다. 린델은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부디 바람 소리에 묻히길 바라며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는 동안 밝은 햇살이 두 아이를 따끈하게 구워냈다. 서서히 노곤함이 밀려왔다. 잔물결나무 열매를 한껏 먹었더니 배도 불러오는 참이었다. 유나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느릿하게 감기더니 다시 뒤로 털썩 눕고는 이윽고 잠에 들었다. 린델은 그런 유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본인의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짐을 느꼈다.

“……델!”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델!”

벌떡 일어난 린델은 저 멀리서 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나의 목소리에 깼는지 유나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꼬리를 살짝 좌우로 한 번씩 흔든 뒤, 기지개를 켰다. 꼬리의 가벼운 움직임을 따라 공기 중에서 붕, 붕 소리가 났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나나는 살짝 밭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가린은요? 가린이 절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요.”

나나는 무슨 말이라도 할 듯 입을 한차례 작게 벌렸다가, 곧 다물어버렸다. 바람이 다시 한번 쏴아 불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축축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언제 숨었는지 태양은 종적을 감췄고, 그 자리엔 비구름만 꾸물거리고 있었다.

“가린은 지금 좀 바빠서 내가 널 데려가기로 했어. 얼른 가자.”

“나나, 아기는요?”

유나가 나나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넌 집에 있으렴. 린델 데려다주고 지유랑 금방 돌아올게.”

나나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만 횡설수설 늘어놨다. 린델은 나나의 굳게 다문 입과 그늘진 눈에서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숲속은 점점 강해지는 바람 때문에 사박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린델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유나도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더 이상 보채지 않고 집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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